기악伎樂의 발견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의 고대 연극사에서 중국에서 유입된 ‘대륙 악무’[반도국가인 백제에서 건너갔으나 대륙이라는 용어를 구태어 쓴 까닭은 무엇인가?]를 다음 3 가지 ‘기악’, ‘무악舞樂’, ‘산악散樂’ 등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후 한국과 중국으로 확장하여 결국 하나의 장르가 된 셈이다.

그런데 그 기악의 출발점은 612년[일본 추고 20, 백제 무임금 13, 고구려 영양임금 23, 신라 진평임금 34, 수 대업 8]에 백제에서 미마지가 전한 것으로 삼고 있다.

그 근거는 720년 간행된《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찾아낸 것이다. 하나의 장르로 설정되려면 유입한 사실만으로 성립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의 열렬한 수호자인 성덕태자[572~621]의 비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보급과 교육이 가능했던 것이다. “불·법·승의 삼보를 공양할 때는 외래악을 사용하라”고 명을 내렸다는 것이 일본 학자들의 설명이다.

여기까지가 기악이 일본에서 발견되고 발전된 경위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악이 사라진 장르로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아 있는 것이란 당대의 동대사와 정창원 등의 가면들과 《법륭사 가람연기 병유기자재장》등이나 후대[1223년]의 고구려계인 박근진?近眞[1177~1242]이 지은《교훈초敎訓抄》이라는 기록들이다.

이 부분에서 일본의 기악은 결국 ‘가면무용극’으로 설정되는 계기가 되었다.《교훈초》로 인하여 기악은 행렬하는 무용극으로 설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법륭사 가람연기 병유기자재장》에는 다음과 같은 가면이 소개되어 있다.

사자[머리2개이며 오색털 달린 바지 4벌]/ 사자자[가면 4개 의복1벌 * 이하는 같음]/ 치도[2개 의복1벌]/ 오공[1개 1벌]/ 금강[[1개 1벌]/ 가루라[1개 1벌]/ 곤륜[1개 1벌]/ 역사[1개 1벌]/ 바라문[1개 1벌]/ 고자[3개 1벌]/ 취호[옻칠한 가면1개 1벌]

《교훈초》의 행렬기악은 다음과 같다.

먼저 최초로 치도가 등장한다. 이어서 피리, 북, 바라 등이 들어오고 그 다음이 사자와 사자를 인도하는 사자자가 따른다. 그 뒤를 오공[임금에 해당], 오녀, 금강, 가루라, 곤륜, 역사가 들어온다. 다음으로 바라문, 대고, 대고아, 취호왕, 취호종[이상은 신하에 해당] 등의 순서이다. 이외에도 정창원에는 [‘隨群’이란 이름의] 호인胡人, [모자 쓴]노승 소년]등이 있어서 이들이 따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기악의 모습이다.

여기서부터 적지 않은 학설이 등장한다. 1)《일본서기》에는 ‘學于吳’인데 이를 ‘吳國’으로 해석하고 나아가 ‘吳樂’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런데 ‘오악’이라고 하지 않고 ‘伎樂’이라고 하는 이유는 성덕태자 섭정기가 법화경이 유행하던 시기로 법화경에 기악이 등장하기 때문이라는 비약적인 해석을 내린다. 원래 인도에서 혹은 산스크리트에서 기악은 V?dya이므로 법화경뿐만 아니라 모든 경전이 모두 ‘기악’으로 번역된 것이다.

2) 가면이 중국이나 백제 사람의 얼굴형이 아니고, 호인형이어서 인도에서 왔다는 것이다. 결국 난릉왕을 중국과 비교하여 인도전파설로 나아가며 미마지까지 불사의 불교 용어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중국의 남[송,제,양,후양,진]·북[북·동·서위, 북제, 북주] 조 시대에는 문강기와 상운악을 비롯하여 10여종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를 논의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3) 《일본서기》에는 ‘伎樂’이 아니라 ‘伎樂?’로 기록되어 있다. ‘가면극’과 연결시키기 위하여 ?[舞:일본식 표기]를 뺀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영향은 한국까지 미쳐서 저명한 학자는《한국의 가면극》[뒤에 《한국연극사》로 개칭]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일본연극사에서 ‘무악’으로 분류한 것은 옳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일본의 기악 연구는 앞으로의 연구의 과제가 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이번 백제궁중기악의 일본 버전은 미마지 가면기악을 2 항목으로 설정하여 기악극[서경오팀]과 기악무[최선팀]로 나누어 공연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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