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일차인 1월 19일 우리는 느긋하게 여행을 시작했다. 다낭에서의 이틀째 여행은 대부분 오전은 호텔에서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점심을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배양환씨 가족들은 호텔 인근의 바닷가에서 사진도 찍고, 산책도 하면서 즐거운 오전을 보냈다고 한다. 참 현명한 가족이다.

이날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호이안으로 이동했다. 호이안은 17세기의 뒷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서 깊은 도시이다. 다낭(Da Nang)에서 남쪽으로 약 30km에 위치한 항구도시 호이안은 17세기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

호이안은 하노이나, 호치민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베트남 시민들이나 베트남을 잘 아는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최고의 여행지로 호평을 받는 도시이다.

호이안의 매력은 고풍스럽다는 것. 베트남의 다른 대도시처럼 오토바이의 물결도 없고, 고층 빌딩도 없지만,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이 매력이다.

사람이나, 도시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호이안을 올 때마다 늘 공주를 생각하게 된다. 공주는 백제의 왕도, 조선의 수부도시, 충남의 도읍지였지만, 그러한 옛 모습을 느낄 곳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

앞으로 공주가 인근의 타 도시와 경쟁해가면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공주의 경쟁력은 역사, 문화에 있는데, 이를 잘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고대도시 다운 면모를 살릴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호이안은 참파(占婆)왕국 때부터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포르투갈, 프랑스 등 서방 국가의 상인들이 빈번히 드나들면서 19세기 무렵까지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인 동서 무역의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번영을 누렸던 호이안은 16~17세기에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의 이주가 많아지며 중국인 마을, 일본인 마을이 생기기도 했다. 따라서 도시 곳곳에서 중국과 일본 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흔적도 남아 있다.

베트남 관광지에서 한국인 가이드의 설명은 금지돼 있다. 현지인가이드가 동행을 하기는 하지만, 현지인 가이드들은 대부분 한국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입장권 구매나, 예약 등의 업무를 수행할 뿐이다.

그러니 인솔자인 내가 관광지에 대한 설명을 하게 된다. 어차피 다른 한국여행팀도 한국인 가이드가 관광지에 대한 설명을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가끔 다른 팀 관광객들까지 나의 설명을 함께 듣고, 질문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곤 한다.

호이안에서 가장 오래된 집은 ‘풍흥의 집’이다. 풍흥의 집은 19세기 중엽에 ‘풍흥’이라는 중국 무역상이 자신의 상점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검은 갈색의 목조건물로, 중후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으며, 현재 8대째 후손이 토산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에 사용했던 가구들도 그대로 남아 있다.

풍흥의 집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역류가 많은 이곳은 집 1층까지 물이 들어차는 경우가 많았고, 1층에 물이 얼마나 빠져 있는 가를 보기위해 2층의 한쪽마루는 격자형으로 해 놓았다.

과거 호이안 지역은 중국과 일본 무역상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과거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 흔적들 중 하나가 ‘쩐가사당’이다. 쩐가사당은 1802년 중국인의 후손인 구엔 왕조의 관리에 의해 선조에게 참배를 올리던 주거지로,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유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쩐가사당의 천정에는 원통형의 커다한 향이 걸려있는데, 출타 전 향을 피워놓고 가면 타들어가는 것을 보고 출발한 날짜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베트남의 호이안 지역은 과거에 중국인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중국식의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광조 회관은 그 중 하나로, 1800년대 말 중국에서 온 중국 광저우에서 온 상인들이 지은 회관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과거 중국의 무역상이나 항해사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고, 이곳에서 상거래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현재는 중국 동포들의 향우회 장소이자, 제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호이안에는 유명한 다리가 있다. 바로 호이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내원교’이다. 16세기 말, 호이안 지역은 중국의 무역상들뿐만 아니라, 일본의 무역상들도 자주 드나들던 도시.

그래서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광조 회관 등의 건물이 중국인의 흔적이라면, 내원교는 일본인들의 흔적이다. 당시 광조회관, 쩐가사당, 풍흥의 집 등이 있던 곳은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내원교는 이러한 중국마을과 일본마을과의 교류를 위해 1593년 일본인들이 건설한 다리라고 한다.

내원교의 입구와 출구에는 각각 원숭이 상과 개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유래로는 일본 왕들이 개와 원숭이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원숭이해에 다리가 건설되기 시작해 개의 해에 완공되었다고 해서 이 조각상을 세워 두었다는 설이 있다.

다리 가운데에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까우사원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머리는 인도, 몸통은 베트남, 꼬리는 일본에 둔 아주 큰 꾸(Cu)라는 괴물이 살았는데, 괴물이 움직이면 홍수나 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 꾸를 없애기 위해 꾸의 약점이 있는 이곳에 내원교를 세웠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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