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쭉, 좁쌀만큼 하얀 눈곱만한 모양이 생기고, 가는 나뭇가지에 푸른 기를 띄고 있을 때가 요맘때입니다. 하얀 눈 속에서도 매화가, 그것도 홍매가 말입니다.

저에게 매화는 ‘미깡(귤)’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왜 ‘미깡’이라 부르는지 아직도 알 수 없지만, 그리 부르셨습니다.

매화 눈이 트이고, 지금은 없어진 듯한 삼한사온이 자주 반복되던 이때 쯤 누다락에서 아끼던 미깡을 반쯤 썩은 뒤에야 드시면서 하시던 말씀 “설이 다가오는구나.”

보여도 먹지 못하고, 꼭 그렇게 무를 대로 무른 뒤에야 손톱 밑에 노란 찌꺼기 물이 들을 때까지 두셔야 했는지….

그 시절 공주고등학교에 다니던 오라버니가 제주도 여행에서 사온 귤도 또 그렇게 썩은 모습이 되어서야 먹게 되었지요. “아깝다, 아깝다”하시면서 아끼다 말이죠.

지금은 귤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그 시절 미깡은 중학교 때 생전 처음 보았던 과일이었습니다. 귤이라는 과일은 사치스러운 삶의 모습과 연결되어 있던 시절이었지요. 물론 바나나는 그림에서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저에게는 이때쯤이면 매화와 귤이 항상 짝꿍이 되어 찾아옵니다. 저에게 있어 매화는 정신적인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꽃입니다. 그 추운 계절 첫 봉우리 속에서 새해를 알리기에 충분한 의미가 있는 희망의 꽃이었지요.

선비들은 서로 자랑삼아 “우리 집 매화가 봉오리를 먼저 트고 있다”며 핑계 삼아 꽃소식을 전했답니다.

그러면 소식을 전해 듣고 차 한 잔을 마시러 온 것이 또 다른 선비의 시샘을 불러일으켜 하인들이 밤새 매화꽃을 싸매고, 그 쌈 보자기 안에 뜨거운 물로 더운 공기를 올려 매화꽃을 피게 했답니다.

차 한 잔을 핑계로 매화꽃에 전해지는 이야기 속 선비들을 생각하면 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자연과 사람이 주제, 주체가 되는 자리이니 현장에서의 몸짓이나 눈빛은 어떠했을까요. 선비는 아니지만, 오늘 저는 그 선비의 모습으로, 그리고 그 눈빛으로 작은 촛불의 불빛을 보며 허리를 세우고, 하얀 미소로 머리를 비워봅니다.

그리고 그 가슴 끝에 매달려 있는 은은한 홍매화 향기를 연상하며 들숨과 날숨을 인식해봅니다. 몸에서 숨을 쉬는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동작치료의 첫 번째 해보기입니다.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