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는 자랑스런 백제유적도 있고, 또한 자랑하고 길이 기려야할 한국 근현대의 역사유적 우금티사적(우금티사적)도 있다. 우금티사적은 국가사적지 제387호로 지정된 국가적으로 기념하고 있는 사적지이다.

한국 근현대사가 반외세·반봉건 투쟁 과정에서 민족자주·민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 왔는데, 그 기점이 바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고 그 중요한 사건이 동학농민혁명의 공주전투 즉 우금티전투라는 의미이다.

고개 이름이 ‘우금티’인가 ‘우금치’인가에 대해서는 공주 토박이 어른들인 구상회·심우성 선생님들의 증언에 따라 공주사람들이 원래 불러왔던 이름 그대로 ‘우금티’로 사용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부언해 둔다.

동학농민혁명에서 공주의 우금티전투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출병한 일본군이 조선 식민지화를 위해 경복궁을 점령(음력 6월 21일)했고, 그리고 조선군의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조선관군을 지휘해서 동학농민군(이하 농민군이라고 서술함)을 학살했던 그 현장의 하나이다.

또한 우금티는 농민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항일을 위해 일어선 당시 동학의 남북접연합군 그리고 종5품 도사벼슬을 한 양반 이유상이 항일을 위해 의병장으로 공주인근에서 5,200명을 모아 함께 결집해서 투쟁했던 장소이다.

공주 우금티는 동학의 남북접의 최대연합군과 보수적인 양반의병장이 지휘하는 연합부대가 함께 즉 당시의 진보와 보수가 함께 모여 항일투쟁을 했던 장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1년 넘게 진행됐고, 전국 군·현(현재의 시·군)의 반, 인구의 1/3이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의 공주전투는 공주에서는 10월 23일(이하 음력 기준)부터 11월 11일까지 19일 이상 벌어졌던 사건이다.

당시 충남지역만 국한해서 보더라도 공주전투 앞뒤로 천안(당시는 목천 세성산 전투), 예산, 홍성, 서산 등 여기저기서 일본군·관군 연합군과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공주 전투에는 남쪽 논산 쪽에서 4만명의 농민군과 북동쪽에는 장기면 대교 방면에서 수 만 명의 농민군, 그리고 북서쪽 유구에서는 수 천 명의 농민군이 결집해서 공격을 준비하고 전투를 했던 곳이다.

1994년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즈음해서 학계에서는 재조명 작업이 활발했고 전국에서 20여개 기념사업단체가 만들어져 활동을 했다.

공주에서도 1993년에 우금티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그동안 추모제례와 추모예술제를 진행해 왔고, 사적지의 활용에 대해서 민간차원에서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또한 공주의 동학유적을 찾는 답사객들에게 답사안내를 해왔고, 공주동학답사 안내자를 양성했다.(2017년 제1기)

아울러 공주동학 학술서적(2005년 발간, 2015년 증보 발간된 『공주와 동학농민혁명』) 및 공주동학답사 안내책자를 발간해 왔다. 또는 정신계승과 청소년교육사업의 하나로 충남청소년역사캠프를 진행해 왔다.

그리고 지난 200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하 특별법)이 통과되어 국가차원에서 명예회복과 기념사업이 시작되었고 2005년 공주의 기념사업회도 사단법인으로 재출범했다.

지난 11월 달, 외지에서 온 분들을 대상으로 동학답사안내를 위해 우금티사적지를 방문한 우금티기념사업회 신경미 운영위원장이 우금티위령탑의 진입로에 늘어서 있던 향나무가 모조리 싹둑 베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뒤 공주시에 확인한 결과 ‘구사적지’ 중심의 사적지 정비사업을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1973년에 금학동 현재 위치에 세워진 우금티위령탑은 1994년 동학100주년에 국가사적지 제 387호 지정됐다.

공주의 우금티가 국가사적지로 지정될 때, 공주에서 1993년에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초대회장 회장에 진영일 선생님(당시 공주교대 교수)이 맡으셨는데, 진영일 회장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에서 우금티의 중요성으로 볼 때 국가사적지로 되어 있지 않는 현실에 개탄하여 몇 달 동안 직접 서류를 들고 10여명의 문화재위원들을 일일이 방문해 그 결과로 1994년에 조속히 국가사적지로 지정됐다. 관이 무관심할 때 민간단체에서 해 낸 것이다.

1994년에 국가사적지로 지정될 때, 위령탑 주변 51,896m²(15,699평)이 지정됐다. 그 뒤 2004년 우금티사적의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할 때, 당시 우금티 위령탑 지역은 동학농민군과 직접적인 관련이 부족한 지역이어서 우금티 남쪽지역의 역사성 회복을 주장하는 학계와 우리 단체의 의견이 반영되어 2007년에 문화재청의 결정으로 우금티 남쪽지역을 포함하여 698,297m²(211,234평)으로 확대됐다. 구 사적지를 포함하여 새로운 사적지시대가 열린 것이다.

94년에 위령탑 주변으로 구사적지가 국가사적지로 지정되었다면, 2007년에는 실제 동학농민군이 전투했고 순국했던 전투지를 중심으로 21만평으로 넓혀진 것이다.

국가사적지 제387호인 우금티사적은 구사적지와 함께 신사적지가 병행해 있는 곳이다. 우금티기념사업회에서는 위령탑주변의 구사적지는 1970년대 사적지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새로운 정비사업은 신사적지 지역에 할 것을 제안해 왔다.

1973년에 조성된 우금티사적은 1970년대에 조성된 사적지의 특징이 잘 남아 있어 시멘트 석축, 향나무길, 일본식 나무 심기 등이 특징적이었다.

공주시가 ‘2007년 공주시의 사적지 정비사업’에 의거하여 구사적지에서 수종을 바꾸고 시멘트석축을 돌벽으로 바꾸려 했을 때, 우금티사업회에서는 여론에 호소하고 시청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여 공사 하루 만에 중지한 적이 있다. 구사적지는 위령탑을 정비하는 것 정도로 하자는 것이다.

우금티사적에 대해 국가가 예산을 들여 하는 새로운 기념사업은 신사적지를 중심으로 하고, 구사적지는 1970년대 사적지로서 그대로 보존한다면 우금티 사적지는 더 볼 것이 많고, 이야기 거리가 많은 사적지가 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공주시가 집행하는 ‘2017년의 우금티 사적지 정비사업’은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 국가사적지는 5년마다 한 번씩 정비사업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2015년에 충남역사연구원이 문화재청의 용역을 맡아 우금티사적의 정비계획을 시작했고, 21만평으로넓혀진 구역을 대상으로 정비사업계획을 시작했고, 우리 기념사업회에서도 개인자격으로 설명회에 참여해서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용역이 종결되는 시기인 2016년 4월 문화재청에서 돌연 충남역사연구원에 용역중지 지시를 내리고, 구사적지 중심으로 다시 용역을 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확대된 사적지가 아니고, 구사적지 중심으로 공주동학 기념사업공간을 정비하라고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문화재청의 결정에 우금티기념사업회에서는 충남역사연구원에 공문을 보내 21만평으로 넓혀진 새로운 사적지 중심의 정비계획을 수립하도록 항의했다.

그 이유는 생각할 수 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의 명예회복을 하는 특별법이 발효되고, 2010년에 정읍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출범을 한다.

그런데 소위 보수정권이 출범하면서 동학기념재단 예산은 기념사업을 할 수 없도록 인건비 정도의 예산만 책정되었다고 계속 아우성을 했다.

동학기념재단의 예로 볼 때, 박근혜·최순실 정권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사실상 할 수 없도록 예산으로 압박해 왔던 것이다.

2016년 4월의 문화재청은 공주 우금티의 새로운 사적지 범위에서 일반적으로 200억원 이상의 예산사업계획을 중지하도록 하고, 구사적지에서 50억원 규모로 사업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2015년에 박근혜·최순실 정권이 10억엔으로 ‘한일위안부문제’를 협상, 타결해 주었던 행태가 떠오른다.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는 아베정권에 대해 협상할 수 있는지는 뒤로 하고라도, 10억 엔 즉 100억원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20만 조선 처녀들의 한을 풀어 주는 보상과 기념사업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예산으로 사업하는 것을 막는 행위이다.

2016년 10월부터 최순실·박근혜가 구속되고 2017년 5월 문재인 촛불정권이 출범했다면 이제 공주동학기념사업도 상식 수준에서 재검토 되어야 한다.

2017년 11월, 공주시가 구사적지 범위에서 박근혜·최순실 정권에서 만들어진 ‘역사왜곡 공주우금티사적 정비사업’을 기반으로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촛불정권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당장 중지해야 한다.

또한 구사적지 범위에서 공주동학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역사전쟁을 계속하자고 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적지에서 공주동학정비사업을 추진하고 구사적지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역사전쟁, 지역사회의 분열을 막는 길이다.

구사적지 위령탑에서 ‘동학혁명군 위령탑’이라는 탑신의 글자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글씨이며, 비문에는 ‘동학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5.16과 10월유신을 추진’했다고 되어 있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항일의 반외세 투쟁이며, 부패한 조선왕조를 개혁하려했던 반봉건 투쟁인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지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공주 위령탑을 방문하는 뜻있는 많은 학자와 학생들 그리고 동학유족들은 군사독재정권의 역사왜곡에 분노해 왔다.

1985년에는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 주최로 공주와 대전지역 대학생·청년들이 모여 공주사대에서 우금티위령탑까지 4.19기념 마라톤을 하고 동학혁명의 기념비문에 있어서는 안 될 역사왜곡의 글자들 ‘5.16’과 ‘10월유신’, ‘박정희’등을 쪼아 내는 행사를 했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시퍼렇던 시절에 구속을 각오하고 감행한 역사바로잡기 행사였다.

구사적지 범위에서 위령탑은 계속 유지하면서 공주동학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5.16’과 ‘10월유신’의 정당성을 공주시가 앞장서서 홍보하는 꼴이다. 1985년의 우금티위령탑의 그 현장에 있었던 본인으로서는 그러한 역사적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또한 공주시는 1993년 우금티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진 이래 공주동학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거의 민간단체의 의견을 물어 본 적이 없다.

공주의 우금티기념사업회는 공주동학기념사업에 애정을 가지고 25년 가까이 추모제례 등 여러 사업을 추진해 왔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조례’ 제정 취지도 민관협의를 통해 법의 취지의 효과를 더 내어보자고 하는 취지인 것이다.

공주시가 기념할 정신계승 사업으로서, 관광자원으로서 1894년 동학기념사업은 관련 단체와 긴밀히 협의하는 것이 공주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위령탑을 포함해서 구사적지의 조형물은 역사의 평가에 맡기고, 새로운 사적지에서 새로운 시대의 역사적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한발 더 나아간 역사적 기념사업이 될 것이라는 우금티기념사업회의 일관된 주장을 공주시는 수용하길 바라며 박근혜·최순실 정권의 적폐청산 차원에서 새로운 사적지 범위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우금티사적지 정비계획을 진행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외부 기고는 본사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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