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따금씩 내가 살고 있는 집 옆 대학캠퍼스를 산책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한가로이 걷기에는 여기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어둑어둑해지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캠퍼스를 산책하기 위해 또는 넓은 운동장을 걷기 위해 들어온다. 방학이 끝나가니 다시 학생들도 바빠진다.

공부하러 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동아리 활동을 하러 오는 학생도 있다. 나무 아래 벤치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가 하면, 카페는 담소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또한 실내체육관에서 공 튀는 소리가 주변의 어둠을 몰아내는가 하면 운동장엔 걷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물결처럼 흘러간다. 좀 더 어두워지면 주변을 밝히는 가로등과 교수연구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새로운 생기를 불러온다. 이럴 때면 하루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지인이 내게 한 말이 있다. 그는 서울에 모 대학근처에서 산다. 나이 들면서 대학캠퍼스 가까이에서 살면 좋다는 것이다. 생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많아 젊어져서 좋고, 축제나 문화행사같은 볼거리가 많아 좋고 값싼 먹거리도 많아서 좋다는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 원룸 한 채만 갖고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나는 재력이 안 되니 이것만 빼놓고는 다 수긍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산책을 하다보면 나는 외딴곳에 세워진 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떠올라 상전벽해가 바로 이런 것임을 느끼곤 한다. 논두렁밭두렁을 걸어 다니고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환경이 서울의 대학가처럼 변모했다는 외양만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임용시험에 몇 년씩을 매달려야하는 젊은 청춘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 때는 요즘같이 치열한 시험을 치르지 않고 졸업과 동시에 임용된 것을 요즘 학생들은 알까? 당연히 그 당시에는 사범대학이 적었다. 어느 땐가부터 정부는 대책 없이 사범대학을 인가했다.

대학 정원을 늘리는 방법으로 가장 돈 안 드는 학과를 설치할 수 있었던 대학이 사범계이었기 때문에 신청하는 대학마다 승인을 해준 것이다.

요즘 많은 사범대 졸업생들이 임용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몇 년씩 재수해야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 당시의 제도가 효과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걷다보니 벽에 걸어놓은 어떤 학과의 합격자 명단에서 거의 십여 년 만에 합격한 학생의 이름도 보인다. 선생님 되기가 쉽지 않다.

며칠 전 내년 초등학교 임용절벽에 대한 교대생들의 시위에 이어 중등의 임용절벽에 대한 사대생들이 시위하는 기사를 보았다. 문제는 중등이 더 심각하다.

해마다 2만4천여 명의 사범대 졸업생이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대학문을 나서지만, 그중 임용된 교사 수는 3천명이 조금 넘는다.

그러니 경쟁률이 50대 1이 넘는 교과가 생기는가 하면 아예 해마다 선발하지 않고 건너뛰는 과목도 있다. 게다가 요즘 기간제교사의 정규직화 문제도 뜨거운 이슈이다. 이래저래 임용시험을 앞둔 학생들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내가 퇴직하기 전 근무하던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던 선생님 얼굴이 떠올랐다. 군대에 다녀오고 몇 번의 임용고사에서 고배를 마시니 서른이 넘었다고 했다.

내가 퇴임하던 해에도 그는 임용고사에서 고배를 마셨다. 여자 친구를 위해서라도 이번은 꼭 합격해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지금은 정규교사가 되었을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이 비단 이런 것들뿐이랴.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걷다보면 나의 대학시절도 생각나고 그동안 기억의 저편에 자리 잡고 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흙속에 새겨 놓은 글자를 찾는 놀이처럼 조심조심 기억의 실마리를 따라가야 희미하게나마 형체를 드러내놓기도 한다. 나는 나의 지난 시절을 반추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많은 상념들이 떠오른다.

산보를 하다보면 보행자보호펜스에 걸려있는 많은 현수막을 만난다. 학회나 동아리모임에 관한 것들이 많다.

요즘에 와서 총장부재에 관한 해결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부쩍 늘은 것이 눈에 띈다. 그동안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에게 잃어버린 세월이 40개월이니 총장 1순위 후보를 조속히 임명해 적폐청산과 학내민주화를 되돌려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주를 이루었다.

요즘은 내용이 바뀐 현수막이 더 많이 등장했다. “총장공모제 적폐청산하고 총장직선제”로 대학을 정상화하자는 내용이 그것이다. 해결방법이 서로 다른 두 현수막에서 “적폐청산”이란 말을 쓰고 있는 점이 나의 사고를 자극한다. 여기서 요즘 말로 “내로남불”을 읽는다.

한때 총장이 임명되지 않은 국립대학교가 전국에 10개가 넘었고 임용에 관련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정부는 왜 이렇게 미적거렸는지 모르겠다.

하긴 지난 정부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대학평가항목에 총장선출방법을 넣어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유도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학이 평가를 잘 받아 지원금을 받기 위해 이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선출방식을 깜깜이 총장선거라고 지적한 것을 어느 언론에선가 본 적이 있다. 부산의 모 대학에서는 교수가 이문제로 자살했다는 보도도 읽었다.

어쨌든 임용부재가 이렇게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뱀의 머리를 보고 그 뱀의 장단을 알 수 있다 했던가?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글귀가 스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김초원 선생님에 대한 현수막이다. 현수막에는 “‘걱정하지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 김초원(환경교육 07학번) 동문의 고귀한 순직!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그리고 세월호 배안에서 학생들과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 앞을 지날 때면 가라앉는 세월호가 떠오르고 가슴이 먹먹해 진다. 07학번이면 세월호 침몰 당시 나이가 스물여섯 정도가 아닐까? 꽃다운 나이에 가셔서 더욱 안타깝다.

올 7월에 김초원 선생님과 다른 한분의 기간제 선생님이 순직으로 예우를 받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지난 3년 동안 기간제교사이기 때문에 순직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정부의 답변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었다.

사실 이보다 숭고한 희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기간제 교사였지만 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기에 학생들을 인솔하기 위해 배를 탔을 것이다. 담임을 맡은 것을 보면 다른 업무도 다른 정규교사들처럼 똑같이 분장을 받아 처리했을 것이다. 아니 남들이 싫어하는 업무를 도맡아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단지 기간제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놓인 상황에 따라 정해진다. 굳이 과거의 규정에 얽매일 일이 아니다. 다시 회남자에서 본 듯한 글귀가 떠오른다.

아마도 세월호가 인양되었을 쯤 이 현수막이 걸린 듯싶다. 덥고 습한 여름을 지내는 동안 현수막은 바랠 대로 바랬고, 한쪽 옆구리의 각목이 떨어져나간 채 펜스에 묶여있다.

조만간 철거될 것이다. 세월이 더 지나면 그녀의 고귀한 희생도 현수막처럼 빛이 바래고 잊혀지지 않을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서울대학교 교정에는 박종철 열사의 추모비와 흉상이 양지바른 곳에 서있다. 연세대학교에는 이한열 열사의 동산과 추모비가 있다. 다른 대학들도 정의와 민주화를 실현시키려다 희생한 학생들을 기억하기 위해 교정에 추모비를 세웠다.

나는 김초원 선생님이 사표로서 민주화에 앞장선 박종철 열사나 이한열 열사만큼 추앙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사고당시 5층 선실에 있어서 충분히 탈출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 때문에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이다. 내려가면서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공주대학교 교정에도 김초원 선생의 기념비와 흉상이 서기를 희망한다. 새로운 총장이 임명되고 안정을 찾게 되면 가장 먼저 이 일부터 추진하면 좋겠다. 눈에 잘 띄는 곳에서 김초원 선생님의 흉상을 만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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