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의 공주 스토리텔링(140)>

김미경 (스토리텔링 작가/ 원광대대학원 문화콘텐츠전공 교수)

드디어 “충현서원”의 문이 열렸다. 늘, 굳게 닫혔던 문이 2017년 10월 28일에는 거침없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이날은 “충현서원” 앞마당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북적거렸다.

 “충현서원과 함께 하는 제2회 주민자치의 밤”을 위해서 인근 마을 주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마실”을 나와서 밥도 먹고, 춤도 춘다. 정말 살아 숨 쉬는 하루였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계룡산상신농촌체험휴양마을 센터”에서 실고 온 “즉석에서 팡팡 튀기는 팝콘”, “계룡산상신 어머니들이 직접 담근 전통주”, “계룡산에서 3년 숙성된 된장”, “우리 콩으로 직접 빚은 청국장” 등 우리 계룡산 상신마을 특산물들을 “지역특산물홍보 체험부스”에 진열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충현서원과 함께 하는 제2회 주민자치의 밤”에서 “체험부스”도 운영해야 하고, 우리 계룡산 상신마을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하는 “반포면어머니합창단”의 “베틀가” 공연도 준비해야 하는 날에 하필이면 “계룡산상신농촌체험휴양마을 센터”에도 100여명의 손님들이 오시기 때문이다.
 
나는 “충현서원 체험부스”를 얼른 세팅하고, 다시 계룡산 상신마을로 올라와서 세종지역아동센터 어린이와 가족들을 “상신 도예촌 체험장”으로 안내하는 일을 했다. 또, 곧이어 계룡산 등산에서 돌아 올 대전시청 공무원들을 위해 “스토리텔링 쉼터”에 “바비큐 체험” 준비를 체크하는 일을 서둘렀다.

남들은 토요일이라고 단풍 구경 가는 날에 나는 정말 무엇을 위해 이리 분주한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단지, 다시 쏜살같이 “충현서원”으로 내려가서 “팝콘”을 튀기는 일을 내가 해야 한다는 사명의식만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오늘은 반포면 주민자치회 마지막 행사를 마무리하는 날이다. 단지,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자.”

사실 아무 것도 모르고 무조건 지역 발전을 위해 일조해 보겠다고 뛰어든 “계룡산상신농촌체험휴양마을협의회” 대표 일과 “반포면주민자치회” 홍보분과위원장 일은 절대로 나에게 만만찮은 일들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어 힘겨웠지만 버텼다. 대학원 교수로 박사논문을 심사하다가도 반포면만 오면 “베틀가”도 불러야 하고, “팝콘”도 튀겨야 했다.

행복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제, 지역 발전을 위해서 감히 무슨 일을 해보겠다고 선뜻 나서지 않을 작정이다.

요즘 나는 “유종지미(有終之美)”를 생각하고 있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계룡산이 좋아 계룡산 상신마을에 산지 3년째인데 오늘에서야 나는 깨닫는다.

제대로 글을 쓰고,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고독과 더욱 치열하게 싸워야지, 세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제, 고독과 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되기 위해 여러분과 만나는 일도 언제 마무리해야 할지 고민할 것이다.

공주 지역은 내가 연구한 어느 대상지보다 많은 역사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역사문화의 고장이다. 그런 공주 지역에 사는 일이 보다 의미 깊어지길 바라며…

<2017년 10월 28일, “충현서원과 함께 하는 제2회 주민자치의 밤”에서 “반포면어머니합창단” 주민자치 프로그램 발표 모습 및 “계룡산상신농촌체험휴양마을” 체험부스에 오신 오시덕 공주시장님과 상신 어머니들의 모습>

<반포면 공암리 문화원형 조사 : 충현서원>
 
충현서원사적비(忠賢書院事蹟碑) -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충현서원(忠賢書院)은 충청도 최초의 서원으로 조선 선조 때 고청(孤靑) 서기(徐起)가 중국 남경(南京)에서 주자(朱子)의 초상을 구입하여 돌아와 그의 서실에 봉안했던 것을 원근의 학자들이 서기에게 청하여 강당을 짓고 「박약(博約)」이라 명명하고 동서재(東西齋)를 각각 「진수(進修)」와 「천이(踐履)」라하고 강당 북쪽에 사당을 지어 주자의 화상을 걸어놓고 제향(祭享)하였다.

그 후 고려의 이존오(李存吾)와 조선의 이목(李穆) 및 성제원(成悌元)의 옛 집이 모두 회덕(懷德)이었으므로 함께 배향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원이 소실되자 주자 화상도 역시 없어져 버렸다.

그 후 18년이 지나 1610년 박희성(朴希聖)과 그의 아들 박희철(朴希喆) 및 민재문(閔在汶), 박로중(朴輅重)등이 재건하였는데 주자의 화상 대신 위판(位版)으로 대신하였다.

그 후 조헌(趙憲), 김장생(金長生), 송준길(宋浚吉) 등이 추배(追配)되었으며, 인조(仁祖) 2년(1624년) 「충현(忠賢)」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다. 1653년 임우기(林遇箕) 최규일(崔奎一) 등은 최유해(崔有海)가 중국에서 주자 화상을 가져와 봉안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해 9월 1일에 이를 모사하여 신판(神版)의 후원(後院)에 봉안하였다.

1790년(정조 14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는데,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당시 주자의 영정은 공주향교로 옮겨 봉안되었다.

1891년(고종 28년)에 유림들이 단(壇)을 건립하여 제향하였으며, 1925년 원래의 자리에 다시 복원되었다.

주자의 화상을 재봉안한 후에 세워진 이 비는 대제학 최규서(崔奎瑞)가 짓고, 우의정 조상우(趙相愚)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이조판서 윤덕준(尹德駿)의 글씨이다.懷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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