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기고>계룡산이 키운 공주의 역사인물(4)

화산(華山) 정규한(鄭奎漢, 1750-1824) 계룡산 시인, 계룡산 학자

화산 정규한은 공주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면서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우암(송시열)-수암(권상하)-남당(한원진)-운평(송능상)-성담(송환기)를 이어받은 19세기 공주의 대표적인 노론 학자였다. 공주의 역사인물을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정규한은 1750년(영조 26)에 태어나 1824년(순조 24)에 세상을 떠났는데, 본관은 장기(長鬐)이고, 자는 맹문(孟文), 호는 화산(華山)·운수산인(雲水山人)이다. 장기 정씨는 오늘날에도 계룡면 금대리·화헌리·죽곡리 등에 많이 살고 있다.

한양에서 공주를 거쳐 전라도로 가는 삼남대로변이어서 바로 옆 경천리에는 조선시대 공주지역에 설치된 6개 역의 하나인 경천역이 있었다(나머지는 광정, 일신, 단평, 유구, 이인역). 1930년까지 경천리에 계룡면사무소가 소재했을 정도로 이곳은 공주 남부의 중심지였다.

벼슬보다 성리학 연구로 일관

정규한은 저명한 성리학자인 송환기에게 배웠는데, 관직이 아닌 성리학 연구를 평생 갈 길로 정했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진사시 1년을 앞두고, “과거를 위한 공부가 성리학 연구를 방해한다”고 스승에게 토로한다. 그러자 스승은 “한 달에 열흘은 과거공부를 하고 남은 날로도 넉넉히 학문을 할 수 있다”며 제자를 독려했다. 결국 그는 이듬해인 1780년, 사마시를 3등으로 합격했지만 이후 대과는 일절 보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다. 과거시험 보는 일 자체를 명리를 좇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1790년 봄, 정조가 성균관에서 직접 책(策)으로써 선비들에게 시범을 보이면서 ‘학(學)’을 제재로 글을 짓게 했는데, 정규한의 글이 가장 뛰어나다는 게 중평이었다. 그런데 시험 주관자가 그를 2위로 낮추면서 대신 회시(會試)에 응할 자격을 주는데 그쳐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애석하게 여겼지만, 정작 그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1795년에는 어명에 응해 ‘여객부유적벽하(與客復遊赤壁下)’라는 제목의 7언 고시를 지어 올림으로써 ‘삼상(三上)’의 등급을 받고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하사받았다. 호학군주였던 정조가 주자의 글 100편을 직접 엮은 책을, 그것도 처음 내려준 것이어서 크게 영예로운 일이었다.

정규한은 화헌리에 화산정사를 짓고 학문을 강독했다. 학문과 인품을 겸비해 그에게 배우려고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1815년 충청도관찰사로 공주(충청감영)에 부임한 홍석주가 그를 알아보고 ‘경명행수(經明行修,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바름)하는 선비’라며 조정에 천거하기도 했다. 정규한은 오로지 학문에 힘쓰는 한편, 유림 명의로 상소문을 짓는 등 호서지역의 사족활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송환기의 수제자로서, 지역의 대표적인 노론 학자로서, 더욱이 문장을 잘하기로 이름난 그로서 당연한 행보였다.

효도와 공경으로 의를 행하라

그는 또한 지역에서 향약을 실시했다. 입효출제(入孝出悌)를 가르치고 봄에는 향음례(鄕飮禮, 유생들이 모여 향약을 읽고 술을 마심)를, 가을에는 향사례(鄕射禮, 활쏘기를 겨룸)를 주관했다. 그의 향약은 선에는 상을, 악에는 벌을 주어 풍속을 교화한다는 목적에 충실해 향속이 크게 변했다고 한다. 그의 향약 중에 ‘상을 당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동약인(同約人)이 있으면 각자 힘을 내어 농사를 짓게 한다’는 조항도 있어 그가 추구하는 가치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정규한은 문중의 자제들에게, “화평한 기운과 돈목한 풍습이 가정에 넘치고 원근에 전파되었다. 가문 지친(至親) 간에 돈목한 우의를 잃고 쟁단이 벌어진다면 가도가 반드시 멸망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이목구비와 손발이 있어서가 아니요 효도와 공경으로써 의를 행하기 때문이다.

학문은 반드시 효도와 공경에 근본을 둔 뒤에야 성현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 스스로 사서와 [심경(心經)], [근사록]의 중요대목을 매일 외워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의 묘표(墓表)에는 “태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고, 허튼말을 하지 않았으며, 홀로 거처할 때에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했다.”고 기록되었다.

시 264수 남긴 계룡산 시인

그는 시문 짓기를 즐겼고 ‘성담의 문하 5백인 중에서 제일’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당대의 문장가로 꼽혔다. 시문집인 <화산집>이 전해오는데, 여기에 오언절구 31수, 칠언절구 92수, 오언율시 48수, 칠언율시 48수, 오언고시 20수 등 모두 264수나 실려 있다. 그중 계룡산에 은거하는 삶을 스스로 예찬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世愛浮榮不愛山 세상은 영화만을 좇느라 산은 사랑하지 않으며,

靑雲頭白背靑山 청운의 꿈을 찾아 머리가 세도록 청산을 등지네.

却怪朱門屛幛裏 문득 괴이한 것은, 세도 높은 가문의 병풍 속에는

幽閒多畵白雲山 그윽하게도 흰 구름과 산을 많이도 그려놓았네.

그가 1824년, 향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평소의 존경받았던 삶을 증명하듯 상복을 입은 지인들이 8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 살던 화헌리에 묻혀 화헌뜰을 내려다보고 있고, 바로 앞 화산사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의 사후 호서유생 기백 명이 그의 학행을 기려 벼슬을 내려주기를 수차례 청원해 1892년에 사헌부 지평이 증직되었다. 매년 음력 9월 22일 화산사에서 제향을 올리는데, 올해는 양력 11월 10일이다.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