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들의 숲-6

6

넝마도사의 침묵은 길고 깊었다. 고마한은 스승과 말을 섞고 싶어도 도저히 스승의 침묵을 깰 용기가 없었다. 처음엔 무척 심심하고 갑갑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고마한도 차츰 침묵의 세계에 익숙해갔다. 오히려 고요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면 동학의 혼령과 진자 스님과 산신령의 그림자가 고마한의 뜰을 언뜻언뜻 찾아오곤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넝마도사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고마야, 그래, 새끼 도사로 지내는 맛이 어떠냐?”

고마한은 뛸 듯이 기뻤다. 스승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말은 어긋났다.

“사부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제자를 유괴하여 굴속에 처박아놓다니.”

“이놈아, 네가 나를 유괴했지 내가 너를 유괴하지 않았다.”

넝마도사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고마한 스스로 넝마도사를 기꺼이 스승으로 삼고 즐거이 따라온 터였다. 넝마도사는 고마한이 먼저 자신에게 달라붙었다는 점을 들어 그리 말했을 것이다.

“하여튼 뭔가 오리엔테이션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리엔테이션? 이놈아 내가 그래서 이 고생이잖아.”

고마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리엔테이션 때문이라고요?”

넝마도사가 껄껄껄 웃었다. 제자의 어이없는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몹시 즐거워보였다.

“그렇다, 이 도사 새끼야. 너의 신입 프로그램을 마련하느라 내가 입을 꾹 닫고 이 고생이다. 입에서 똥내가 다 날 지경이다. 자, 그럼 프로그램을 진행해볼까? 고마야, 너는 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고마한은 또다시 어이가 없었다. 느닷없이 도가 뭐라니.

“거, 시작치고 너무 야하네요. 그걸 알면 제가 여기 있겠습니까?”

“어려울 것 없다. 도는 만물의 언어를 깨치는 것이다. 그럼 우주라는 무대에서 춤을 추는 만상과 만법이 한눈에 들어오는 법이지. 그렇다고 도가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가까이에 있다.

내, 난생 제자를 두어본 적이 없지. 그런데 느닷없이 네가 내 앞에 나타났다. 말하자면 나에게 너는 새로운 도의 대상이다. 나는 너의 언어를 깨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서부터 너와 나의 도가 시작될 것이야.”

“그럼 저도 사부님의 언어를 깨쳐야 하겠네요?”

“아무렴. 너는 내 새끼니까. 자, 너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너를 처음 만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볼까? 너는 쇠파이프로 자동차를 3대나 때려 부수고 감옥에서 나를 만났지. 그때 너는 헬조선 어쩌구 하면서 저항의 언어 덩어리를 쏟아냈다. 정신도, 몸짓도, 언어도 온통 이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곧 수구(守舊)의 언어를 뱉어냈지.”

“제가 수구의 언어를 뱉어냈다고요? 언제요?”

“음식점에서 실증적 역사 어쩌구 하면서 네가 배운 역사 나부랭이를 지키기에 급급하지 않았느냐? 내 역사관을 손톱만큼도 이해하려 들지 않고 말이야. 저항의 언어와 수구의 언어가 불과 며칠 새 너의 입으로부터 튀어나왔다. 모순의 언어를 사용한 셈이지.”

고마한에게 식당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사부님의 신화적 역사관을 실증적 역사관으로 받아친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동시에 ‘역사는 학자들이 지금까지 펴낸 기록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것까지 생각났다.

“사부님, 언어의 대상이 다를 때는 앞뒤를 대비할 수 없는 것이죠. 앞의 것은 사회현실이고 뒤의 것은 역사잖아요? 그런데도 대비한다면 그거야말로 억지요, 모순이 아닙니까? 뒷방 늙은이도 그 정도는 압니다.”

“앞뒤의 대상이 다르다? 과연 그럴까? 역사는 무엇일까? 집단이 경험한 사건의 집적을 토대로 집단의 정신을 기록한 것이지. 역사는 사건의 기록인 동시에 집단의 정신줄이야. 경험은 집단의 DNA로 둔갑하여 집단 구성원의 정신 저 밑바닥에 새겨지는 것이지.

한편, 지금의 사회현실은? 집단이 행한 결과가 아니겠나. 말하자면 현실은 역사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이야. 우리는 이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지. 즉 역사와 현실은 동일한 시간의 궤적 위에 있는 동일한 대상이야. 역사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역사가 되는 것이지. 따라서 대상이 다르다는 네놈의 주장은 무지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야.

자, 그럼 어떻게 될까? 모순의 언어는 결국 무지의 언어가 되는 셈이지. 그러니 이 세상은 혼돈의 언어로 가득차고 혼돈의 언어는 혼돈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거야.

이제 알겠느냐? 이 새파랗게 무식한 놈아.”

고마한은 스승이 펼치는 눈부신 언어의 세계를 당장 반박하기 어려웠다. 역사와 현실이 동일한 시간의 궤적 위에 있는 동일한 대상이라고? 두고두고 씹어봐야 할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렇다 치죠.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역사와 현실이 동일한 대상임을 알았으니까 네놈은 이제 출발선에서 다시 시작해야지. 자, 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현실을 인정하는 길과 현실에 저항하는 길이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라.”

고마한은 난감했다. 기존의 역사로서는 기존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까지의 그의 언행이 모순에 직면한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그는 자존심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고마한은 넝마도사의 추궁에 답하지 않고 최대한 버텨보기로 했다.

“사부님, 저는 이미 자동차를 때려 부숨으로써 제 갈 길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사부님도 통쾌한 퍼포먼스라고 하시면서 저와 함께 낄낄거리지 않았습니까?”

“이놈아, 언어는 관계적이야. 감방동기와 사제지간의 언어는 그 영역을 달리 하는 것이지. 아직 그것도 몰라? 이 멍청한 놈아.

또한 그때는 현실과 역사를 분리하는, 너의 잘못된 역사관이 파헤쳐지기 전이었다. 지금의 역사로는 지금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그럼, 그 길을 선택할 텐가?”

고마한은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고마라는 음식점에서 나온 뒤 우금치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스승은 새로운 세계를 정립하라고 용기까지 북돋아주지 않았는가.

“사부님, 우금치에서의 일을 잊어버리셨습니까? 그때 사부님은 저의 선택을 인정하고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정립하라고 용기까지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식당에서 나누었던 저의 역사관이 드러난 뒤가 아닌가요?”

“아니지, 네놈의 인식이 중요한 것이야. 그때도 너는 너의 역사관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어. 나의 지적에 비로소 너는 지금 네 자신의 역사관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야. 그러니 지금 선택하라고.”

“아니죠. 저는 그렇다 치고 사부님은 그때 제 역사관을 인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편을 들지 않았습니까?”

“아, 그놈 참 말이 많다. 그땐 너의 프로그램을 종합적, 체계적으로 마련하기 전이었다. 그럼 알아듣겠냐?

아울러 나는 네놈에게 지금 당장 새로운 선택 요소를 하나 더 제시하겠다.”

말을 마친 넝마도사는 엉거주춤 일어나 바위굴 천장에서 빛나는 무엇인가를 내려놓았다. 고마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인 머리통만한 크기의 커다란 황금덩어리였다. 원래 천장에 붙어 있었던 것인지, 떼어낸 바위덩어리가 황금덩어리로 변한 것인지조차도 가늠할 수 없었다. 넝마도사는 황금덩어리를 고마한에게 밀어주며 말했다.

“고마야, 너는 자동차를 때려 부숴 이 사회에 울분을 한껏 쏟아냈다. 그 직접적 동기는 네가 대학을 나와 10년이 되고도 직장을 얻지 못한데 있지.

고마야, 그 황금덩어리를 보아라. 그 정도면 세상에 나가 한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모자라면 내가 더 줄 수도 있지.

어떠냐? 두 갈래의 길에서 너는 어느 길을 선택할래? 현실에 순응하는 길과 현실에 저항하는 길이 네 앞에 놓여 있다.”

고마한은 당황했다. 이제 와서 황금덩어리를 들고 세상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개떡 같은 사회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빌붙어 사는 길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 역사를 바꿀 수도, 세상을 바꿀 수도 없었다.

고마한은 스승의 언어 앞에 낱낱이 파헤쳐진 자신을 발견했다. 스승의 언어는 예리한 칼이었다. 고마한에게 엄청난 슬픔이 몰려왔다. 발가벗겨진 자신이 난도질당하는데 대한 슬픔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유곡의 슬픔일까? 슬픔의 끝자락에서 고마한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스승에게 울면서 달려들었다.

“사부님, 이건 불공평합니다. 아주 지독한 갑질입니다. 사부님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저에 대한 비밀병기를 개발했습니다. 저도 지금 답하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넝마도사는 제자의 앙탈에 가까운 몸부림을 너털웃음으로 받았다.

“껄껄껄. 암,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지. 기다리겠다.”

하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마한은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넝마도사는 그런 제자를 애틋하게 지켜보면서 병수발을 들기에 바빴다. 넝마도사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고마한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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