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들의 숲-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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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넝마도사가 찾아든 곳은 산속 바위굴이었다. 굴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럭저럭 두세 사람이 비비적거리며 지낼 수 있는 정도였다. 고마한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스승인 넝마도사에게 썩 잘 어울리는 주거였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주위에 세워진 허름한 안내판을 보니 그 굴은 사라진 주미사 바로 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주미사지(舟尾寺址)에 굴이 붙어 있어 그 옛날 주미사가 혈사(穴寺)의 하나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있는 고마한을 넝마도사가 은근히 불러 앉혔다.

“고마야,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자사(眞慈師)의 이야기를 아느냐?”

“네? 진자사의 이야기요? 모릅니다.”

“신라 진지왕 때 진자 스님이 이곳 주미산에 온 일이 있었단다. 벌써 1500년 전 일이야. 그 스님은 서라벌에서 여기까지 천리가 넘는 길을 걸어오면서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한 번씩 예를 올렸으니[一步一禮, 일보일례], 그 정성과 고초의 크기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지.”

“와! 놀라운 데요. 요즘 스님들의 삼보일배(三步一拜)가 거기서 유래되겠군요?”

“딴은 그렇겠구나.”

“진자 스님이 이곳에 왜 오셨죠?”

“미륵선화를 만나기 위해서였지. 이 산 너머 옥룡동 수원골에 수원사(水源寺)가 있었단다. 처음에 스님은 꿈에서 계시 받은 그곳으로 미륵선화를 찾아갔지. 하지만 만나지 못하자 어느 스님이 이곳 주미산으로 가보라고 하여 여기까지 왔단다. 그때 주미산은 천산(千山)으로 불리고 있었지. 그 스님이 이곳을 가리켜주면서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아느냐?

“무엇이라고 말했는데요?”

“현인과 철인이 즐비한 곳이라고 했단다. 말하자면 이곳은 현자들의 숲이지. 진자 스님이 이곳에 오자 노인으로 변신한 산신령이 스님을 맞았단다. 당연히 스님은 노인에게 미륵선화가 있는 곳을 묻지 않았겠니? 그러자 노인은 진자가 수원사에서 잠시 마주친 소년이 곧 미륵선화라고 일깨워주었단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물론 진자 스님은 우여곡절 끝에 미륵선화를 만나게 되지. 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고마야, 내, 이쯤해서 너에게 주는 이야기가 있으니 명심하여 듣거라.”

“네, 사부님. 명심하여 듣겠습니다.”

고마한은 긴장감과 함께 희열을 느끼며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곳 주미산은 옛날 옛적부터 현자가 수없이 모여 사는 곳이다. 산신령, 도사, 수도자, 은자의 터전인 셈이지.

고마야, 어젯밤 이 산줄기의 한 쪽 끝에 자리한 우금치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려무나. 너는 내 말 한 마디에 큰 깨달음을 얻었을 게야. 하지만 그건 내 힘만이 아니었다. 동학의 혼령들이 너를 흔쾌히 도왔기 때문이지.

말하자면 이곳은 현자들이 모여 사는 유쾌한 4차원의 공간이란다. 항상 숙연한 마음으로,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이야. 그럼 머지않아 너에게도 4차원의 눈이 열릴 것이다.”

“사부님, 명심하겠습니다.”

“다음은 진자 스님의 발자취를 자주 더듬어보아라. 그는 미륵선화를 만나러 일보일례하며 천 리길을 찾아왔다. 지극한 정성이 담겨 있는 성지순례와 다름없지.

미륵선화는 누구일까? 이상사회인 미륵세계를 관장하는 미륵불을 풍류문학으로 표현한 상큼한 존재겠지. 미륵세계는 너와 나 그리고 동학의 사람들이 꿈꾸는 세계와 다르지 않다. 꿈을 위하여 너는 그 머나먼 길에 그 같은 간절함을 쏟을 수 있겠으며, 동학도처럼 목숨을 바칠 수 있겠느냐?”

“사부님, 그 말씀의 뜻, 깊이 새기겠습니다.”

넝마도사는 진자 스님의 이야기를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굴속 바위 위에 정좌하여 깊은 침묵의 세계로 들어갔다. 고마한은 그런 넝마도사를 지켜보면서 스승은 지금 숲속의 현자들과 노닐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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