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동진’ 전도사 박동진판소리전수관 김양숙 관장

▲인당 박동진판소리전수관

아직 햇살은 여름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매미가 짝을 찾느라 애를 태우고 있지만, 바람은 선선한 미소로 다가온다.

모처럼 푸른 치마를 입고, 맑은 얼굴을 보여주는 가을하늘과 인사를 나누며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을 찾았다. 우리 조상들의 마음씨를 닮은 듯 널찍한 대지에 한옥으로 지은 전수관이 대견스럽다.

나이 탓일까 아니면, 익숙함 탓일까? 앞뒤로 트인 한옥에 앉아 있노라니 참 좋다. 우리 것이, 우리 소리가, 점점 좋아진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를 외쳤던 박동진 명창의 말이 새록새록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 말을 하셨던 분과 동고동락했던 물건들이 그대로 머물고 있는 공간. 그 정겨운 공간에 내가 있다. 그리고 그분과 수십 년을 함께 했고, 이제 그분의 업적을 기리며, 소리를 전수하고 있는 제자도 함께 자리했다.

▲김양숙 관장

박동진판소리전수관 김양숙 관장. 작은 체구, 단아한 모습이다. 전에 단체로 김양숙 관장에게 판소리를 배워본 적이 있는데, 참 쉽게 잘 가르쳐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처음으로 우리소리를 접했다.

36년 동안 음악과 사귀고 있는 나는 정작 한국에 살면서 서양여자만 여자로 알고 사귀고 있는 꼴이었다. 정작 우리 음악에는 문외한에 가까웠다. 나이 50이 넘어서야 우리 소리를 처음으로 접해본 것이다.

“저는 시골에서 풍장을 치면 그 리듬이 저절로 흥이 나는 것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멀리까지 들리는 징소리의 여음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습니다.

판소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처음 접했는데, 마냥 좋았습니다. 판소리와 축구를 같은 시간대에 방송을 하면 오빠는 축구를 보려고 했고, 그러면 저는 국악을 보고 싶어서 울었지요.

그러면 어머니께서 제 편을 들어 주셔서 판소리를 봤는데, 그때 박동진선생님께서 민속백일장 대회에 심사하러 나오셨고, 그 후에도 박동진 선생님의 함자가 계속 나왔습니다. 저의 뇌리 속에는 ‘판소리’하면 ‘박동진선생님’으로 각인돼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인력으로 어찌되지 않는 일이 있다. 마냥 좋은 것, 마냥 끌리는 것, 마냥 하고 싶은 것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김양숙 관장은 다른 소리꾼에 비해 비교적 늦게 판소리에 입문했다.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김 관장은 고3이 될 때까지는 그저 언니, 오빠가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듣는 착한 동생이었다.

김 관장은 아버지가 일찍 별세하셔서 언니, 오빠가 부모역할을 했고, 그 언니 오빠는 국악 쪽으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대학 입학을 앞둔 고3. 그녀는 국악을 전공하고 싶었다.

선생님과 상담을 하니 선생님도 국악을 모르셔서 그녀는 어머니에게 “국악을 하고 싶다”며 졸라댔다. 그러자 색소폰을 잘 연주했던 오빠는 “가수를 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김 관장은 “ 난 가수 싫고, 소리하고 싶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지성이어서 감천이었을까. 당시 동네에 유랑극단이 왔는데, 어머니가 안사도 될 약을 두병이나 사면서 박동진 선생님을 만날 방법을 물어 서울 국악협회로 연락하면 박동진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리로 전화해 종로에 있는 박동진선생님의 학원 전화번호를 알아 고교 졸업식 전날 학원으로 찾아갔다.

당시 박동진 선생께서는 종로 3가 단성사 5층 건물에 계셨는데, 전화를 받은 선생님께서는 “일반사람은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셨다. 막막하기만 했다. 김 관장은 벼랑 끝에서 선 심정으로 “강원도 삼척에서 왔어요”라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추운데 잠깐 올라 와라”하시더니 “소리한 번 해봐라”라고 하셨다.

김 관장은 이에 심청이 팔려가는 대목을 부르니 선생님께서는 “목이 참 맑다”며 “한번 가르쳐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박동진 선생의 제자가 된 것.

▲대학시절 김양숙 관장이 박동진선생에게 소리를 사사받고 있는 장면.

이후 김 관장은 박동진 선생의 수제자로서 제2의 삶을 살게 된다. 전라도의 경우 일곱 살부터 판소리를 시작하는데 비해 턱없이 늦게 판소리계에 입문한 김 관장은 그 세월의 공백을 오로지 노력으로 메워야 했다.

“박동진 선생께서는 무대에서는 욕을 잘 하셔도 제자들에게는 절대로 욕을 안 하셨습니다. 가장 큰 욕이 ‘너 이놈, 너 이놈의 계집애’였습니다. 말씀도 없으시고, 눈을 지그시 감고 계실 때가 많았는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칭찬도 너무 안 해 주셔서 정말 지치고, 낙담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진짜 죽어라고 열심히 했더니 몇 개월 후 학원 키를 주시더군요. 제가 전수 장학생 3명중의 하나가 된 것입니다.”

박동진 선생은 국악계에서 ‘구두쇠’라고 소문이 나서 ‘돈동진’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돌아가실 때 방배동의 집을 팔아 장학금으로 기부하고 가셨다.

지금도 국립국악고, 전통예고에고에는 박동진 이름으로 20만원씩 장학금이 전달되고 있다. 박동진판소리전수관도 85세에 선뜻 사비 1억원을 들여 지었다.

“선생님께서는 고향인 공주를 굉장히 사랑하셨고, 늘 그리워 하셨습니다.  7살 때까지 사셨던 공주가 선생님께서는 서러움이자, 그리움의 고장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어렸을 때 불을 냈던 이야기, 소를 놓쳐 혼났던 이야기, 배를 타고 공주를 떠나던 이야기 등 어린 시절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셨습니다. 늘 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셨는데, 동네 분들 성함까지 다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판소리를 배우면서 전라도 사람들에게 얼마나 치었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제가 한양대 강의를 나가는 것보다, 우석대 강의를 나가는 것을 더 기뻐하셨습니다. 전라도에 가서 박동진의 소리를 전하니 기쁘셨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충청도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오기로 소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리(판소리 사설에서 음률이나 장단에 의하지 않고 일상적 어조의 말로 하는 부분)도 충청도말로 하셨습니다.”

▲ 김양숙 관장의 대학원졸업 시 박동진 선생이 김양숙 관장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박동진 선생께서는 “소리 못하면 김양숙은 죽은 거야. 목 재주 있는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 못 봤다”며 오로지 노력을 강조했다. 착한(?) 제자인 김양숙 관장은 대학 4학년 때까지 그야말로 죽어라고 노력했다.

그런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콩팥 한쪽이 완전히 파열된 것. 진통제를 계속 먹어가면서 12시간씩 계속 소리를 하다가 결국 그녀는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이미 신장 한쪽은 기능을 잃어 버려 ‘소리는 무리라는 판정’을 받았고,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낙심한 그녀는 자살까지 시도하려했지만, 보살펴 준 오빠를 생각해 마음을 돌려 암자를 찾아가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지게꾼을 대동해 지으신 약을 가지고 암자로 찾아와 그 약을 먹고 KBS국악대경연에 나가 은상을 받았다.

“선생님께서는 부채를 들면 호랑이선생님이시지만, 부채를 놓으면 인자하셨습니다, 사람 냄새 가 나는 인간적인 사람이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예술도 존경하지만, 인격도 참 좋아합니다.”

김양숙 관장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은 타인 대비 함량미달의 ‘모자람’이 아니라 ‘절정’에 이르지 못함에 따른 스스로의 부끄러움이다.

“한동안 공연을 사양했습니다. 부족하게 느껴져서 이지요. 저라고 왜 공연을 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저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도 공연을 하고 다니는데…. 그러던 중 서울에서 판소리 전수조교 발표회가 서울에서 열리게 됐는데, 제가 하도 사양을 했더니 김수현 선생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너무 감사한 마음에 ”해 보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대로 목이 안 나와 죽고 싶었습니다. 당시 저의 아들 고한돌이가 애기 때였는데, 그 어린 것이 있는 힘을 다해 ‘얼씨구 좋다, 잘한다’하며 취임새를 넣어 주더군요. 남편은 제가 중간에 쓰러질 까봐 업고 올 생각을 하고 말까지 준비를 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기를 쓰고 그 어려운 적벽가, 새타령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제 소리를 듣다가 다 울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간절함으로 봤구나 싶었습니다, 지금은 찾아가는 공연, 기획공연에는 무대에 서고 있습니다.

▲적벽가를 부른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내년에는 어떻게 해서는 박동진선생 관련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싶습니다. 박동진 선생께서는 중고제에서 시작해서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개발해 ‘인당제’를 완성시키셨습니다.

교육청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판소리 체험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국악체험을 한번 해보고 사서 소리를 하고 싶다는 아이들이 있어요. 가르쳐 보면 재능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단지 그동안 그런 재능을 발견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 아이를 찾고 싶습니다. 그런 아이를 잘 지도하면 제2의 박동진, 제3의 박동진이 탄생하지 않겠어요. 무조건 ‘어렵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소리에 대한 관심이 중요합니다.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은 자물쇠를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공주분들이 잘 오시지 않습니다. 이 중요한 전수관을 지어 놓고 말입니다. 2년 전부터 박동진판소리전수관에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판소리 무료강습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시민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공주시가 판소리의 중심지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그렇다.

▲ 김양숙 관장이 판소리를 하고 있다.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