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개걸 판사의 요즘 일상은 비교적 평온했다. 특별히 복잡한 사건이 없는데다 이제는 공직생활을 청산하고 로펌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담담히 공직생활의 황혼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한 도개걸 판사에게 며칠 전 부쩍 흥미 있는 사건이 눈에 들어왔다. 재물손괴 사건 둘이었다. 재물손괴 사건은 잡범 수준에 속해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 재물손괴 사건 둘은 어딘지 흥미 있어 보여 도개걸 판사는 두 사건을 함께 심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번째 재물손괴범은 이름이 넝마도사였다. 검사도 범인의 이름이 이상해 끝까지 추궁했지만 넝마도사라는 자백만을 얻어낸 모양이었다. 나이도 확실하지 않지만 백 살 가까이 된다고 했다.

범인이 주민등록증도 없어 지문조회까지 해보았으나 범인의 신분이 끝내 드러나지 않은 이상한 사건이었다. 범죄내용도 야릇했다. 백제 역사에 관한 도서관의 책 3권을 직원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히 파손한 혐의였다.

두 번째 재물손괴범은 고마한이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 그는 공주 터미널 근처 길거리에 주차되어 있는 승용차 3대를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쇠파이프로 마구 파손한 혐의였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관까지 폭행하여 공무집행방해죄까지 추가된 사건이었다.

재물손괴범에 대한 재판이 열린 날, 법정서기 박틀비는 공판조서를 작성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될수록 법정의 열기가 뜨거워갔다. 특히 판사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서기 박틀비가 보기에 도개걸 판사가 일찍이 이렇게 냉정함을 잃었던 때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이 달 말이면 판사직을 그만두고 유명한 로펌으로 자리를 옮겨 변호사로서의 새 삶을 시작한다고 하지 않는가.

—피고인1을 향하여—

재판장 뭐? 평생 넝마 하나만을 걸치고 살았다고? 그게 말이 돼? 그럼 거지지 도 사는 무슨 도사야?

피고인1 남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지. 하지만 내 두 가지의 예언을 하겠소. 하나는, 판사인 당신은 곧 우리를 석방할 것이야, 또 하나는, 당신이 로펌으로 가면 돈이 당신을 망칠 것이라는 사실이야.

재판장 뭐, 뭐라고? 당신? 여기는 신성한 나의 법정이다. 감히 어디서 반말 찌꺼기 를 내뱉어?

피고인1 내 나이 백 살쯤 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에게 반말을 했어. 그 런 후레자식에게 내 어찌 말을 높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공무원은 국민의 머슴이거늘.

재판장 뭐, 뭐라고? 후레자식? 머슴? 좋다, 좋아. 내 말을 높이지. 그런데 그런 엉 터리 예언이 어디 있어? 아니, 있습니까?

피고인1 엉터리?

재판장 그렇소. 차라리 내가 예언을 하겠소. 첫째, 그대들 피고인 둘은 감옥에서 오래오래 썩을 것이오. 둘째, 피고인이 로펌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모 르지만 나는 로펌으로 가 평생 잘 먹고 잘 살 것이오. 그러니 당신 예언은 엉터리란 말이지. 아니, 말입니다.

피고인1 껄껄껄, 글쎄, 길고 짧은 건 두고 봐야겠지. 그런데 로펌의 연봉이 10억은 되지? 무려 서민 연봉의 100배에 이르지. 거기에는 이 사회로부터 한 푼도 받지 않는 내 몫도, 이 청년의 몫도 당연히 포함돼 있을 것이오. 그러니 많 은 액수를 사회에 기부하고 사시오.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횡액에서 자유 로울 수 없을 것이오.

재판장 무슨 궤변이오? 당신은 일할 의사가 없고, 또 하나는 일할 능력이 없어, 둘 다 고 모양 고 꼴이 아니오? 나하고는 신분이 다르지. 자본주의는 알아서 각자에게 그의 몫을 배당할 것이오. 그러니 횡액에 빠져있는 것은 바로 당 신들이오.

피고인1 자본주의는 만능이 아니오. 자본주의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공산주의처럼 머지않아 종말을 고할 것이오. 그보다는 우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바 라오.

재판장 자, 자, 이제 헛소리 그만 하고 정리 좀 합시다. 범죄의 동기가 공주의 잘 못 된 역사에 있다는 생각도, 아직도 피해액을 변상할 마음이 없다는 생각 도 변함이 없는 거죠?

피고인1 그렇소.

—피고인2를 향하여—

재판장 피고인 고마한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피고인 넝마도사의 예언이 맞겠는가? 내 예언이 맞겠는가? 아니, 맞겠습니까?

피고인2 그야 당연히 사부님의 예언이 맞겠죠.

재판장 뭐라고? 둘 사이는 사제지간? 언제부터?

피고인2 지금 이 시간부터. 나는 사부님에게서 예언자로서의 강한 영적 기운을 느꼈 습니다. 그래서 현 시점부터 그를 스승으로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재판장 뭐라고? 예언자로서의 강한 영적 기운? 좋다, 좋아. 어디 두고 보자. 누구 예언이 맞는지. 자, 이 사건도 정리합시다. 피고인 고마한은 피해자인, 차주 들과도 경찰관과도 합의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거죠?

피고인2 그렇습니다.

—이어서 검사가 피고인1에게 벌금 300만원, 피고인2에게 징역 3년을 구형하고, 피고인들은 최종변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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