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기고>계룡산이 키운 공주의 역사인물(1)

학문으로 신분을 뛰어넘은 고청 서기(徐起, 1523-1591)

공주는 호서(오늘날의 충청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로써 1603년부터 충청감영이 설치되었고, 조선시대 강학활동의 중심기관이었던 서원이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것도 공주땅이었다.

고청(孤靑) 서기(徐起)가 주도해 1581년(선조 14)에 건립한 반포 공암리의 충현서원이 그것이다.

서기가 원래 태어난 곳은 남포 제석촌(보령시 남포면)이다. 본래 신분이 낮았는데 뛰어난 학문 실력으로써 양인이 되었다고 한다. 신분상 제약 때문에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지만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배우고 교류했다.

그는 중년 이후에 계룡산 자락인 공암에 정착해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기호학파의 맥을 이땅에 정립하는 역할을 했다. 기호학파는 근기(경기) 및 호서 지역을 기반으로, 영남학파와 더불어 조선후기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뤘는데, 공주·논산·대전 등 금강의 중상류 지역이 중심이었다.

서기는 7세 무렵에 홍주(지금의 홍성)로 이사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제자백가를 두루 읽고 불교 경전에도 심취했다. 그는 20세 무렵부터 보령의 토정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교통이 오늘날처럼 원활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배움에도 지역적 기반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사계 김장생의 학문이 공주·회덕·논산의 제자들에게 이어진 것처럼, 서기도 20리 인근의 스승 이지함에게 배운 것이다.

혁혁한 양반 가문 출신이었던 이지함은 화담 서경덕에게 배워 학자로서 이미 이름이 난 때였다. 이지함은 서기를 제자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서기는 날마다 왕래하며 3년을 배울 정도로 학업에 매진했다.

나중에 홍주 교수로 부임한 조헌도 이지함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이지함은 서기와 조헌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제자로 꼽았다고 한다.

이지함에게 배우고 명유들과 교류하다

1550년경부터 서기는 이지함과 함께 전국을 두루 둘러보았다. 지리산도 제주도도 함께 갔다. 둘은 사제지간이면서 동시에 6살의 나이차를 잊은 망년지우(忘年之友)였다고 하겠다. 서기는 스승의 소개로 이중호 문하에서 3년간 [대학] [중용] 등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이중호는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은 유우의 제자였다.

이지함이나 서기와 교유관계를 맺은 인물들은 대부분 화담 서경덕의 학문적 영향 아래에 있었다. 화담학파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개방성과 다양성이 특징이었고 과학계통에도 통달했다. 서기가 천문·지리에 해박해 선기옥형(혼천의)과 같은 천문 관측기구를 제작한 것도 그 결과였다.

서기는 공암으로 오기 전 지리산 홍운동에서 4년간 살았다. 홍주에서 향약청을 짓고 여씨향약을 시행하다가 여의치 않자 가족을 이끌고 은거한 것이다. 지리산에는 이지함이 조헌과 함께 찾아와 몇 개월 동안 같이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서기는 나이 52세인 1572년에 비로소 공주에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반포 온천리 거북골에 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스스로 ‘구당(龜堂)’으로 불렀다. 곧이어 계룡산 고청봉 아래 공암으로 이사하고 ‘고청’이라는 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69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서기가 공암에 ‘연정학당’을 세우고 강학을 하자 인근에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동춘당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 초려 이유태의 스승이 된 민재문, 그리고 나중에 충현서원을 중수한 박희성 등 기라성같은 제자를 배출했다. 말하자면 서기가 호서유학의 못자리판을 공암에서 펼친 것이다.

충청우도 최초로 서원을 건립

서기는 1581년, 지역의 유생들과 공주목사 권문해 등의 도움으로 공암정사(후일의 충현서원)를 세웠다. 여기에 주자의 영정을 모셔놓고 석탄 이존오, 한재 이목, 동주 성제원 등 고장의 명현을 배향했다. 충청우도 최초의 서원이었다. 서원에 배향된 3인은 공주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고려말 공민왕 때의 강직한 언관 이존오는 고향인 공주 석탄에서 요절했고, 이목은 공주 소학동에 유배된 바 있었던 ‘무오 5현’의 한 사람이었으며, 성제원은 공주 태생으로 벼슬을 마치고 고향에서 성리학 연구에 매진해 이름이 높았다.

공암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0년에 서기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수해 1624년(인조 2) ‘충현’으로 사액을 받았다. 그에 따라 토지 3결에 대한 면세권을 얻고 경제적 후원도 잇따랐다.

이때는 호서지역 서인계가 정권에 대거 참여한 인조반정 직후로서, 주자를 주벽으로 모신 것도 사액을 받는 데 작용한 듯하다.

충현서원은 1660년 논산의 돈암서원이 사액받기까지 30여 년간 호서우도 유일의 사액서원으로 역할을 했다. 나중에 조헌·김장생·송준길·송시열 등 서인과 노론의 큰 인물들을 추가 배향함으로써 권위도 한층 높였다.

서기는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6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병석에서 부인에게 “내년에 반드시 왜란이 있을 것이니 대비하라.”고 말했는데, 가족들이 그대로 지켜서 화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밖에도 그의 탄생 설화를 비롯해 이지함과의 신비한 행적, 중국에 자주 왕래한 이야기, 남명 조식을 찾아간 일화, 신통력으로 동학사와 궁궐의 불을 끈 이야기 등이 지금까지 전한다. 신분을 초월한 그의 뛰어난 역량이나 폭넓은 활동은 계룡산의 신비함을 더해준 이야깃거리였다.

생전이나 사후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그에게 지평의 관직과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 뒤인 1752년(영조 28)의 일이다. 충현서원에도 온전히 배향되지 못해, 지평에 추증되고 공주 유생들의 상소가 있은 뒤에야 별향(別享)으로 모시게 되었다.

요즘 다양한 문화재 활용정책의 덕으로 충현서원에서 크고작은 학술·문화 프로그램이 펼쳐지고 있어 다행이다. 나아가 ‘교육의 도시’ 공주에서 ‘공부’와 ‘가르침’의 길을 훌륭히 걸은 고청 서기 선생을 제대로 기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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