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길 교수의 러시아 여행기-7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제법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과 비를 맞고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여기 사람들은 대체로 성품이 느긋한 것 같다. 어느 곳을 가도 뛰거나 서두르는 사람들을 보기 어렵다.

그게 이 나라 사람들의 원래 모습인지, 아니면 오랜 사회주의 생활에서 형성된 습관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늘 쫓기듯 매사에 바쁘게만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좀 신기하게 보이기도 한다.

비를 맞으며 돌아다녀야 하나, 하는 걱정스러운 생각이 좀 들기도 했으나 그게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식당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다시 방으로 올라와 짐을 정리하여 로비로 내려갔다. 이 도시는 인구 천 5백만의 러시아 최대 도시다. 한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내 주었던 수도의 위치도 혁명 이후 회복하여 지금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거대한 평원의 자작나무 숲 속에 건설되어 자연 환경이 좋고, 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답게 각종 문화 유적이나 기념관, 박물관 등도 잘 갖추어진 도시다.

어렵게 방문한 이런 도시를 오늘 단 하루만 볼 수 있다는 게 아쉽기 그지없지만, 그런 대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알려진 몇 곳을 찾기로 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제일 먼저 멈춘 곳은 혁명 광장이다. 잘 알다시피 러시아는 제국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19세 중엽부터 황제들의 방탕과 사치, 귀족들의 수탈과 횡포, 관리들의 독선과 무능 등으로 민중들이 고통을 받게 되고,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는 움직임이 싹텄다.

그들은 은밀하게 조직을 결성하고, 토론을 통해 힘을 기르며, 민중들의 의식을 깨우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발각이 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들의 활동에 구심점 역할을 하는 사상은 독일 출신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였다.

그는 엥겔스와 함께 1848년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고, 1867년에는 저 유명한 “자본론”을 출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레닌은 철저한 마르크스 사상 신봉자였다.

1917년 2월에 황제와 귀족의 횡포에 반발한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나 황제가 쫓겨났다. 이 봉기에는 현역 군인들도 합세하여 황제가 있는 궁전에 함대의 대포를 발사하기도 했다.

결국 황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내주고 말았다. 곧 이들에 의해 새로운 임시 정부가 출범했다. 이 사건을 이른바 2월 혁명이라 한다.

그런데 권력을 장악한 임시 정부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부르주아 중심의 임시 정부 권력에 반발하는 프롤레타리아 중심의 세력은 임시 정부의 정책과 집행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파였기 때문에 소외되어 있을 수박에 없었다.

혁명 당시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레닌은 소식을 듣고 곧 귀국하려 했으나 당시 권력층의 견제와 반대로 입국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돌아와 소수파이지만 강경한 노선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여러 부분에서 온건한 노선의 실권파와 대립을 했지만 숫자에 밀려 자신의 포부를 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 둘의 노선 투쟁이 저 유명한 멘셰비키파와 볼셰비키파의 싸움이다.

열세에 놓여 있던 레닌은 당시 실세였던 트로츠키와 손을 잡고 극적으로 실권파들을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한다. 이것이 바로 10월 혁명이다.

권력을 장악한 레닌은 곧 새로운 체제의 국가를 세웠는데, 이로써 지구상에 최초로 사회주의 체제 국가가 현실화되었고, 이는 전 세계 진보적 청년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애초 마르크스의 예상대로라면 자본주의 체제가 자체 모순에 의해 몰락한 이후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독재 체제를 거쳐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되어야 했다.

그 스스로도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가장 앞선 영국 등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리라 예측했는데, 현실에서는 1차 산업인 농업 중심 국가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으니 그의 이론과는 잘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어긋남은 뛰어난 이론가이자 행동파인 레닌이 교묘하게 러시아 지배층의 부패와 개혁적 청년들의 사회적 분노를 적절히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해석해 보면 그 의문이 쉽게 풀린다.

레닌은 그 후 스탈린과 더불어 소련의 막강한 지도자가 되지만 얼마 안 되어 1924년 세상을 떠난다. 레닌과 함께 혁명을 성공 시킨 스탈린은 레닌 사후 공포의 정치로 악명을 남기며 세계를 벌벌 떨게 만들었는데, 그의 생전에 곳곳에 세워졌던 동상은 소련 해체 이후 거의 다 철거되었다고 한다.

반면 아직도 레닌의 동상은 러시아 여러 곳에 남아 있고, 붉은 광장의 레닌 묘에는 참배객이 줄을 잇고 있다.

혁명 광장은 땅이 많은 이 나라답지 않게 매우 작은 규모다. 기다란 높이의 원석을 세워 위에만 다듬어 마르크스의 얼굴을 조각해 놓았고, 중간에는 러시아어로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한다.

그 아래로는 색깔을 입히거나 다듬지 않은 돌 그대로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사상가이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학자 1순위로 꼽히기도 하지만, 우리로서는 공산주의 원조, 민족 분단의 원인 제공자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래서 오랜 동안 그의 책은 금서가 되었고, 소지하고만 있어도 국가보안법으로 중형을 선고 받았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지식인 청년들이 그에 열광했던 것은 그의 사상과 주장이 민족 모순과 더불어 계급 모순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복과 분단 이후 그는 불온한 학자를 넘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범죄자, 원수로서의 이미지가 덧칠해졌다,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자 아니면 바보고, 나이가 들어 거기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또한 바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마르크스의 사상이 보편성과 역사성을 함께 갖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니, 그를 단순히 범죄 용의자를 길러 내는 사람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붉은 광장이다. 붉은 광장은 색깔이 붉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러시아어 단어 가운데 ‘붉다’와 ‘아름답다’라는 뜻을 동시에 가진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로 된 이름에서 아름답다는 의미가 점점 바뀌어 이런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애초의 이름은 ‘아름다운 광장’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이 광장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와 꽤 깊은 부정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 광장의 이름과 함께 이 나라의 국기도 붉은 색 위주로 되어 있는데, 그 붉은 색이 바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색깔이 되어 이후 공산주의자를 지칭할 때 붉은 색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민족 분단 전쟁을 거치며 이념 대립이 격화되어 그들을 증오하고 적대시하며 붙여진 이름이 소위 ‘빨갱이’다.

어느 원로 정치인은 상대편을 이념적으로 공격할 때 불그스레하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우리 정치 현실에서 붉거나 그 비슷한 색깔로 규정이 되면 정치판에서 매장이 되는 게 보통이었다.

얼마나 으스스하고 무서운 일인가.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는 그런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니 이념적으로 보면 붉은 광장은 바로 원조 빨갱이들의 소굴이자 그 진원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나라도 공산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고, 우리나라도 상당히 자유로워져서 그런 낡은 이념적 공세는 너끈히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공산주의는 이제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졌고, 일부 국가에서 간신히 그 명맥만 이어가고 있는 중이니 이제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심장이고 붉은 광장은 모스크바의 심장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이 광장은 러시아의 역사와 정신, 정체성과 혼이 담겨 있는 곳이다.

애초 시장이었던 이 광장은 제국 시절 황제의 즉위식이나 열병식 등이 열려 위엄을 과시했고, 군대의 출정식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 후 속속 국가 주요 시설이 하나씩 들어서기 시작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현재 이 광장의 구성을 보면, 가로 세로 백 미터와 7백 미터의 직사각형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에 크렘린 궁전, 역사박물관, 굼 백화점, 성 바실리 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크렘린 궁은 광장보다 훨씬 넓은 면적에 역대 황제들이 거처했던 궁전, 황제와 가족들이 예배를 드렸던 여러 개의 아름답고 화려한 러시아 정교회 성당, 역대 황제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성당, 황제들이 남긴 유물 전시관, 높은 탑, 오래된 종,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대포 등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일정상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현재 푸틴 대통령이 집무실도 크렘린 안에 있고, 각종 정부 기관 사무실도 옆에 있어서 이 궁전은 여전히 러시아의 정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이 궁전의 광장 쪽 벽 아래에는 레닌의 영묘가 있다. 레닌의 유해는 방부 처리되어 지금도 참배객에게 공개되고 있다.

다만 참배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 하루 3시간, 일주일에 4일만 공개하기 때문에 줄을 서서 기다려도 꼭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제한된 시간이나 숫자가 되면 아무 때나 거기서부터 중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갔을 때도 길게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날이 뜨거울 때는 간혹 기다리다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 한다. 죽은 레닌이 살아 있는 사람을 지배한다 할까.

그 맞은편은 백화점이다. 이 백화점은 역사가 120년이 넘는다는데, 굼이란 백화점 이름은 러시아 국영 백화점의 첫 글자를 딴 것이라 한다.

광장의 길이와 거의 같은 큰 건물로 건물 자체가 대단히 아름답고, 그 안의 장식이나 시설이 매우 화려하고 예쁘다. 인공 나무와 분수도 있고, 조명 또한 잘 되어 있어 휴식하기도 편하게 되어 있다.

1층에는 세계적 브랜드의 명품을 파는 가게들이 죽 이어져 있고, 그 위층에는 레스토랑, 카페, 공연장 등의 시설이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처음에는 황실의 가족을 위해 만들었으나 현재는 러시아 사람뿐 아니라 외국 사람들도 많이 찾는 쇼핑의 명소가 되었다.

백화점에서 직각으로 오른쪽에 있는 붉은 색 건물이 러시아 국립 역사박물관이다. 그 건물 또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오래된 것이고, 그 안에는 러시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시대적으로 잘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다는데, 우리는 아쉽게도 그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놈의 정해진 일정이 야속하기만 하다. 만약 또 이곳을 오게 된다면 이런 곳에 좀 더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는 프로그램으로 와야 할 일이다.

백화점의 맞은 편 끝에 있는 건물이 바로 저 명성 높은 바실리 성당이다. 이 성당은 이반 4세가 2백여 년 동안 러시아를 지배하던 몽골을 물리쳐 내몬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여덟 개의 별이 연결되어 있는 모양의 알록달록한 둥근 형태의 돔이 매우 이색적인데, 마치 소용돌이치는 양파 모양의 이 지붕은 이 성당을 모방하여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피의 성당과 그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

10년도 안 되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완성된 성당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다른 어느 성당도 따라올 수 없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야기로는 이 성당을 지은 황제가 더 이상 이런 건물을 못 짓게 하려고 건축가를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이는 그만큼 이 성당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당 안에는 차분한 조명 아래 신앙과 관련된 각종 그림, 조각, 성물 등이 잘 전시되어 있다.

이 광장은 지금도 여러 국가적 행사가 열리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가장 큰 행사는 5월 1일의 노동절 기념행사, 10월 혁명 기념행사 등이다.

그밖에 군대 사열이나 열병, 새로운 무기 공개, 대규모 국가 행사 등이 이 광장에서 열린다. 그러나 평소에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된다.

예비 신혼부부들이 웨딩 촬영하는 장소로도 애용된다. 이처럼 이 광장은 국가적인 행사나 용광로 같은 서민들의 열정 발산 장소,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적 용도로도 사용되고 있으니 단순히 넓고 큰 열린 공간일 뿐 아니라 인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는 죽은 공간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생명과 혼이 살아 있는 현장이다. 일찍이 최인훈 선생은 “광장”이란 소설에서 광장 없는 밀실이나 밀실 없는 광장은 비정상일 수밖에 없다고 갈파했거니와, 밀실(개인)로 상징되는 자본주의나 광장(집단)으로 상징되는 사회주의 모두 완전과는 거리가 있는 만큼 상호보완점을 찾는 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광장도 이제 과거의 역할을 떠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하기를 바라면서 작별을 했다.

밥을 먹기 위해 참새 언덕이라는 곳을 지났는데, 이 도시가 평원에 세워진 까닭으로 별로 높지 않은 언덕인데도 여기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고,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라고 했다.

비가 오락가락할 뿐 아니라 시간이 없어 내리지는 못하고 버스 창을 통해 잠시 시내 풍경을 구경했다. 점심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가이드가 이런 식당에 오는 고급 고객이 하는 대로 해 보자며 권해 윗옷을 벗어 팔에 걸치고 들어갔다. 정장을 하고 오면 종업원들이 옷을 받아 보관했다가 나갈 때 돌려준다고 한다. 메인 메뉴는 돼지고기 구이인데, 알맞게 구운 고기가 맛이 좋았다.

밥을 먹고 차창 밖으로 모스크바 국립대학 건물의 외관을 보며 이동하여 톨스토이 박물관을 찾았다. 톨스토이는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대작가이자 문호(文豪)다.

또한 그는 작가일 뿐 아니라 사상가, 혁명가, 종교인, 예술 이론가이기도 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물려받은 재산이나 책을 출판해서 번 수입으로 평생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살았으나,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했다. 임종도 집에서 편안히 맞은 게 아니라 낯선 객지에서 쓸쓸하게 맞았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백 수십 킬로 떨어진 부친의 영지(領地) 야스나야폴냐나라는 곳에서 1828년에 태어났다. 그의 긴 수염 때문에 흔히 착각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일곱 살이 적다.

그의 부친은 백작이었고 꽤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는 형 셋과 함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두 살 때 그의 모친이 여동생을 출산하고 난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홉 살 때는 부친마저 사망하여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그의 양육은 숙모와 유모가 담당했는데, 이런 환경이 그로 하여금 안정적 정서를 갖는 데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6세 때 카잔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공부에 별 뜻이 없어 방황을 했고, 집에 있는 많은 농노 하인들을 생각해서 그들을 위한 일을 하려 법과로 전학을 했으나 그마저 여의치 않아 그는 술과 여자로 방탕하다가 결국 자퇴를 하고 만다. 타락된 생활을 계속하다가 이러다가는 폐인이 되고 말 것 같다는 생각으로 군인인 형을 찾아간다.

처음엔 단지 방탕한 생활을 바꾸려고만 했기 때문에 하급병사로 지냈으나, 나중에 전투에서 공을 세워 장교로 승진한다.

이 동안에 그는 글을 쓰는데, ‘유년 시절’, ‘소년 시절’ 등 몇 편의 작품은 호평을 받아 문명(文名)을 날리게 된다.

전투가 끝나 귀환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여러 문인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분야의 글을 썼고,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이미 상당한 평가를 받는 문인이 되어 있었다.

그가 세른 네 살 되던 해에 운명의 여인 소피아를 만나게 된다. 중산층 가정 출신의 그녀는 친구의 딸로 그보다 열여섯 살이나 어린 열여덟 살의 처녀였다.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을 했고, 그는 그 아내와 같이 사는 15년 동안 열 세 명의 자녀를 낳는다. 이 시간 동안 그는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그의 아내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결혼 후 거의 임신을 안 하고 있을 때가 없을 정도의 몸임에도 글을 쓰는 남편을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그녀는 악필의 원고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은 물론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작품에 관한 자료를 구하는 일이나 글에 대한 남편의 의견 요구에 성실하게 응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전쟁과 평화”란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의 침략 전쟁 전후 15년을 다룬 역사소설로 다섯 가문의 인물 약 5백여 명이 등장하며, 크게 보면 영웅이나 큰 권력을 가진 사람과 이름 없고 힘없는 민중으로 대별되는 인물들 가운데 후자 쪽에 초점이 맞추어진 작품이다. 이는 그의 역사관과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 된다.

그 다음으로 쓴 작품이 “안나 까레리나”인데 정숙했던 여자 안나와 블린스키라는 멋진 남자와의 불륜을 제재로 다룬 작품이다. 안나는 그의 부인을 모델로 한 인물이란 설이 유력하며 실제 그는 나이 어린 아내를 의심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가 많은 인물의 등장과 복잡한 이야기로 산만한 점을 보이는 반면 이 작품은 단순하고 일관된 스토리에 집중함으로써 문학적으로는 더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가리켜 결점 하나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이 작품을 쓰고 난 뒤 톨스토이는 많이 변했다. 우선 종교적으로 변신을 해서 권위에 빠진 당시 교회와 성직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성경이나 교리 해석에서도 자신만의 독단적인 주장을 강조하여 끝내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그는 자신만의 종교를 이론과 실천을 통해 정립하여 5계명을 새로 제정하는 등 교주와 같은 지위를 갖게 되는데,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톨스토이즘'이라고 하여 이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또한 그는 재산 소유와 농민에 대한 생각도 과감하게 바꾸어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빈민이 되고자 했다. 이것 때문에 아내와는 의견 충돌이 생겼고, 부부 사이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재산을 전부 포기하는 것은 철회했으나 아내에게 모든 저작권을 양도하고 그는 궁핍한 생활을 자초했다.

그는 71세 되던 해에 핍박받는 종교인들의 해외 추방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활”을 썼다.

이 작품은 네플류도프란 귀족이 젊은 시절 친척집 하녀 카츄사라는 처녀에게 임신을 시키고 떠났는데, 그 처녀는 그 후 창녀가 되어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고, 그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한 네플류도프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모든 것을 버리고 시베리아 강제 노동 형을 선고 받고 떠나는 카츄사를 따라가 청혼을 하지만 여자는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런 속죄로 인해 그의 부활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장편이며 예술적 유서라고도 평가되는데, 한 귀족의 양심이 속죄의 정신으로 부활한 것은 마음속의 새로운 신을 발견하는 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세 작품을 흔히 톨스토이의 3대 작품이라 하는데 이것 말고도 그는 여러 편의 소설을 썼고, 또 소설 외에 시, 희곡, 동화 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썼다.

그 외에도 그는 예술론, 인생론, 도덕론, 교회 개혁에 관한 글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많이 쓰고 발표했다. 발표한 글로 인한 수입도 많았고, 사람들의 존경도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말년은 매우 불행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미치광이 소리를 듣는가 하면 스스로 자초한 가난한 삶에다가 사교계로 나선 아내로부터도 대접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1910년 가출을 한다. 막내딸과 의사만 대동한 채 그는 역으로 가서 무작정 기차를 탔다. 내키는 대로 가다가 아무 데서나 내려 쉬고 또 목적지도 없이 다시 출발하는 여정이었다.

노인의 몸으로 혹한의 날씨에 여행한다는 게 힘든 일이었지만 그는 모든 걸 내려놓은 이 자유로운 여행에 만족했고 또 행복해 했다.

그러나 노령의 몸에 무리를 해서인지 독감에 걸렸고, 더 이상 여행을 지속하기 어려워 아스타포보(후일 이 역은 톨스토이 역으로 이름이 바뀐다)라는 시골 역에서 내린다.

이 역에서 역장이 빌려준 방에 들어가 쉬려고 누웠으나 다음 날 아침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에 톱뉴스로 전해졌고, 그의 시신은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열차로 운구(運柩)되어 그의 고향 땅에 묻혔다. 유언대로 묘지는 아무 치장을 하지 않아 소박하다고 한다.

톨스토이 박물관은 1805년에 건축된 건물로 이 작가가 1901년까지 20년 동안 실제 거주했던 집이다. 그의 사후 1911년 아내는 이 건물을 국가에 기증했고, 국가는 이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1914년에 개관하였다.

여기에는 약 1천여 점의 톨스토이 관련 유품이 보관되고 있고, 박물관은 실제 그가 거주하던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톨스토이 박물관은 여기 말고도 여러 곳에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유품이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고 한다.

박물관은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에는 식당, 어린이 방, 침실, 어린이 놀이방 등이 있고, 2층에는 올라가자마자 곧 만날 수 있는 홀과 아내의 방, 딸의 방, 집필실, 운동하던 방, 식기 보관실 등이 있다.

식당에는 막 식사를 했던 것처럼 그의 가족들 의자와 식기가 놓여 있는데, 말년에 채식주의자가 된 것을 보여주는 그릇 구성 등이 특이했고 그의 자리도 항상 고정되어 있었다 한다.

침실에는 그가 부인과 잠을 잤던 침대가 있고, 침대 옆에는 잠에서 깨어 차를 마시던 찻잔이 금세 사용했던 것같이 놓여 있다.

어린이 방에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2층의 홀은 꽤 넓은데, 약 40명의 손님이 연회를 하거나 작은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하며, 아내의 방은 이 집에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곳으로 그 안에 각종 사치품과 옷, 장신구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입구가 막혀 있어 들어갈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의사로 자원 봉사를 다녔던 딸의 방에는 읽던 책과 생활 용품들이 그대로 있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구입한 식기들이 꽤 많아 그걸 보관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운동하던 방에는 그가 직접 사용했던 아령이 바닥에 놓여 있고, 또 러시아 최초의 자전거도 있었는데 그런 걸 구입할 수 있는 돈이 없는 서민들에게는 꽤 고급의 사치품이었을 것이다.

2층의 전시실에서 인상적이었던 곳은 그의 집필실이었다. 집필실에는 책상 위에 바로 글을 썼던 것처럼 종이와 펜이 생생하게 놓여 있고, 책상에서 글을 쓰다가 무엇을 마시려 하던 중에 시력이 안 좋아 놓쳐서 무슨 액체를 엎질렀던 흔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며, 안경이 없으면 잘 보이지를 않아 벽 쪽으로 기어가서 벽을 짚고 일어섰다는 말도 방의 구조상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또 특이했던 것으로는 그가 직접 만들어 신었다는 장화를 만드는 도구와 장화였다. 여자는 옷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남자는 장화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며 그는 직접 가죽을 손질하여 신발을 만들어 신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박물관의 공간이 널찍해서 느낌이 시원했으며, 작가가 실제 오래 거주했던 곳에 생전의 생활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해 놓은 것이 아주 보기 좋았고, 해설하는 분이 마지막으로 우리를 홀에 모아 놓고 그 옆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키며 톨스토이가 직접 작곡하여 연주했던 것이라며 멜로디를 들려 준 것과, 또 그가 어디선가 연설했던 내용이라며 잠깐 녹음으로 그 육성을 들려주어 직접 그 카랑카랑하며 약간 갈라진 듯한 그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 오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밖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서 있는 꽤 넓은 정원이 있고, 사무실이나 부속 건물로 사용되는 몇 채의 건물이 있었다.

정원 입구에는 판넬로 된 톨스토이와 그의 부인 모습이 서 있어 관람객이 그 옆에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게 되어 있다.

그가 돌아간 지 백 년이 넘었지만 그가 남긴 문학은 오래 남아 오늘도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으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는 말이 허언이 아닌 것 같다.

톨스토이, 그는 많은 작품을 통해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성취를 이루었고, 그 작품들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러니 그는 어느 문인보다도 높이 떠 있는 해와 같다. 그 고고한 위엄이 태양처럼 오래 빛나기를,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따스한 위로와 힘이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박물관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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