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는 모스크바 역으로 향했다. 여기는 역 이름이 우리와는 다르게 붙여진다. 역이 위치하고 있는 도시 이름이 아니라 도착지 도시를 역 이름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대전에 있는 역은 대전역이 아니고, 대전에서 서울로 가는 역은 서울역, 부산으로 가는 역은 부산역이란 이름을 붙이는 식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역 이름만 보고 가서 열차를 타면 그 도시로 가게 되는 것이다.

대전에 있는 역이 대전역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대전에서 서울로 가는 역과 열차 타는 곳을 모르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런 역 이름 붙이기는 꽤 합리적이고 실용성 있는 방법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기사에게 변변히 고마운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뛰다시피 역 안으로 겨우 들어섰다. 비를 맞은 사람들이 물기를 털어내느라 야단이다.

이 역에서는 짐 검사가 까다롭다. 짐 가방과 어깨에 메는 작은 가방까지 모두 엑스레이 투시기를 통과해야 한다. 역으로 들어갈 때 한 번, 또 표를 끊고 열차를 타러 나가기 전에 한 번, 이렇게 두 번의 짐 검사를 거쳐야 한다.

테러 대비를 위한 것이라지만 우리에게는 좀 낯선 일이기도 하다. 분단국가로 북한과 대치하는 휴전 중의 나라이지만 그만큼 우리나라가 안전하다는 증표 아닐까.

한참을 걸어 우리가 탈 객차까지 들어갔지만 아직 차 문을 열지 않아서 그 앞에 서서 대기했다. 사흘 내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애를 쓴 가이드와 작별을 했다.

여성분들이 딱하다며 가지고 있던 한국 음식과 약, 건강식품 등을 챙겨 주며 모성애를 발휘했다. 몸도 불편한데 끝까지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한 그와 따뜻한 마음을 담아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승차 시각이 되어 열차에 탑승해 보니 이 나라 사람들의 체형을 고려해서인지 좌석도 꽤 넓고 시설도 잘 되어 깔끔했다.

개통한 지 얼마 안 되는 고속 열차는 평균 시속이 2백 킬로로 모스크바까지는 네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내 옆자리는 사진작가인 여성분이다. 얼마 전까지 교직에 있다가 명퇴를 하고 지금은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작년엔가 골목을 테마로 한 개인전을 열기도 한 분이다.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짐도 줄이고 시간도 벌자며 도시락을 꺼내 저녁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잠시 앉아 있자니 정해진 출발 시각 7시에 열차는 정확하게 발차했다.

열차는 진동도 별로 없고 정숙하게 주행했다. 밖에는 밤인데도 아직 환하다. 산은 거의 보이지 않고 평원이 계속 이어진다. 거대한 자작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져 끊어질 줄을 모른다.

자작나무는 이 나라의 국목(國木)이다.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자작나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 나무로 장작을 만들어 불을 때기도 하고, 집을 짓기도 하고, 벽난로에 이 나무를 넣어 불을 지피기도 한다.

이 나무 장작으로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은 러시아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이 나무는 생명력이 강해 웬만한 악조건에서도 잘 자라며, 나무의 재질이 단단하고 조밀해서 가구를 만드는 데도 많이 쓰인다.

특히 우리나라 주목처럼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말대로 죽은 나무도 쉽게 썩지 않아 습지나 물위에 건축물을 지을 때 지반 다짐용 말뚝으로 많이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자작나무가 지천이니 이 나라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큰 혜택을 입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밖을 내다보다가 비슷한 풍경이 계속되니 좀 지루해졌다. 마침 옆자리에 앉은 분이 화제를 꺼내 시와 그림, 사진 등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앞으로 하려는 작업이 엄마와 관련된다는 말과 함께 죽음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며 그 의미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도 했는데, 별 생각 없이 보면 평범한 장면도 설명을 들으며 보면 상당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예술이라는 게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가. 평범함 속에서 발견되는 비범함, 특수성에서 찾는 일반성, 개체성에서 나오는 전체성, 구체성에서 유래하는 보편성, 이렇게 모든 예술은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원리를 찾아내고 정립해 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예술에는 칸막이가 있을 수 없고 서로 상통하는 본질을 공유한다고도 할 수 있다.

11시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라니, 한때 그 이름만으로도 불온시 되던 빨갱이들의 소굴, 붉은 도시 모스크바, 거기에 내가 발을 디뎠다는 게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세상이 변하고 바뀌었다는 증거가 바로 내 발밑에 있다. 객차까지 마중을 온 아르바이트 학생 가이드를 만나 역 밖으로 나오는데, 꽤 긴 거리를 걸어야 했다. 밤 깊은 시간이고 또 먼 거리를 이동해 온 터라 몸이 피곤하여 빨리 쉬고 싶은데, 길은 걷고 또 걸어도 끝이 없는 것처럼 멀었다.

그러나 모든 길은 끝이 있는 법, 우리는 드디어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도착해 탑승을 했다. 가이드는 간단히 모스크바 대학 학생으로 아르바이트 가이드를 하고 있다며 자기소개를 한 다음 호텔까지는 5분이면 도착한다고 했다.

우리가 묵을 호텔은 모스크바에 있던 별이 달린 일곱 개의 높고 뾰쪽한 국유 재산인 건물 중 하나를 매입하여 리모델링한 것인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체인 H 호텔이었다.

가이드는 이것이 바로 러시아가 자본주의 국가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 아니겠느냐며 제발 예전의 소련과 오늘의 러시아를 혼동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호텔 로비에 도착하여 방 배정을 하는데, 무슨 일인지 시간이 꽤 지체되어 더욱 지쳤다. 한참 지나서 방 배정이 되어 카드키 열쇠를 나눠주는데, 우리는 2층 방을 배정 받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단추를 찾아도 없어서 3층에서 내려 걸어 내려오려고 했으나 그것도 잘 되지 않아 결국 다시 1층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1층에 내려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니 이 호텔에는 엘리베이터가 2층에 서지 않기 때문에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나이든 사람들이 어떻게 무거운 가방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느냐고 항의하니 방을 바꿔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가이드는 로비 카운터의 직원들과 한참 상의한 후 방이 없다고 한다. 대신 직원들을 시켜 가방을 들어다 주겠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다른 층의 배정을 받았던 분이 짐을 들고 내려오며 그 방에 가니 이미 다른 손님이 들어 있었다고 흥분을 했다. 일 처리하는 솜씨가 유명 호텔 체인답지 않게 영 형편없어 보였다. 이것도 사회주의 잔재 때문인가.

짐을 놔두고 2층 방에 올라가 보니 방이 꽤 넓다. 잠시 뒤 직원이 가방을 가지고 왔다. 팁을 주어야 하겠으나 호텔 측의 무성의에 화가 나서 모른 척했다.

요즘 흔해 빠진 무선 인터넷 와이파이 연결도 매우 복잡하여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연결되었고, 속도가 빠르지 않아 많이 답답했다.

몇 가지 뉴스 검색으로 고국 소식을 확인하고, 손발만 간단히 씻고 여행 일정 메모를 정리한 후 침대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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