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말로만 들어왔던 예르미타지 박물관과 우리 이번 여행의 핵심인 도스토예프스키 기념관을 보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이 잔뜩 흐려 있다. 스마트폰 일기 예보에는 비가 내리는 것으로 나와 있다. 관광에는 이왕이면 날씨가 맑은 게 좋은데, 떠나올 때 워낙 가뭄이 심했던 한국을 생각하면 여기서라도 비를 만나는 게 반가울 것 같기도 했다.

아침 9시 호텔을 출발하여 맨 처음 찾은 곳은 옛날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던 항구였다. 지금이야 무역의 형태나 교역 물량이 달라져 그 역할이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최신, 최고의 정보 교류와 함께 상품 교역이 이루어지던 현장이었을 것이다.

이 등대는 해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조각가의 설계로 19세기 초에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수많은 배들이 안전하게 오가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상당히 큰 규모의 등대는 지금도 의연하게 거친 물결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거기서 모피 종류의 모자와 옷을 파는 상인들의 호객 소리 속에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혼탁한 물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역사나 우리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으로는 일명 ‘토끼섬’이라고 불리는 군사 요새를 찾았다. 여기는 표트르 대제가 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공사를 시작한 곳이다. 여기에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높고 두꺼운 벽을 견고하게 쌓아 요새를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의 지반이 약해서 흙으로 쌓은 성벽이 무너질 우려가 있자 그것을 돌로 바꾸었는데, 문제는 이곳에 돌이 많지 않아 돌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가거나 들어오는 모든 사람과 선박으로부터 돌로 세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석(稅石)을 통해 모아진 돌로 이 섬의 건물과 성채가 완성되었다. 성채가 세워지고 난 뒤 그는 이 섬에 당시 러시아에서 최고 높은 성당을 지었는데, ‘페트로파블로스크’라는 이름의 성당은 그 높이가 122m로 도시 어디서나 그 금빛 위용을 볼 수 있으며 첨탑에 조성된 천사의 상 무게만도 550킬로에 이른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성당에는 베드로 성인의 이름이 붙여졌는데, 그 이름에 값하는 것처럼 역대 러시아 황제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표트르 대제의 유해도 이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가이드는 자유 시간을 주면서 우리를 이 섬에 풀어 놓았다. 우리는 관광객을 위해 조성해 놓은 거대한 토끼 모형도 구경하고, 강에서 섬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관문도 감상하고, 한자로 쓰인 호박박물관 가게를 지나 강으로 나와서 바람을 쐬며 유람선이 지나다니는 강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예르미타지 미술관은 입장 예약 시간이 있어 아무 때나 가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 일찍 점심을 먹기로 했다. 11시 반에 식당으로 옮겨 현지 식 음식으로 밥을 먹었다. 생선과 야채, 수프로 구성된 메뉴였다.

밥을 먹고 나서 혼잡한 도로를 서다가다 반복하며 박물관 쪽으로 향했으나 도저히 정해진 시각까지 차가 도착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해서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했다.

처음 내렸을 때는 흐리기만 했었는데, 박물관 입구에 와서 줄을 서니 곧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행 준비물 목록에 우산과 우비가 있어 가지고는 왔으나 막상 이 현장에는 소지하지 않아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인종과 언어의 관람객이 여러 줄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입장을 위한 그 줄은 엄청나게 길었다.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아마도 줄잡아 기천 명은 되어 보였다. 줄에서 벗어나면 순서가 뒤로 밀리기 때문에 비를 맞으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관람객이 몰리지 않게 한 번에 백여 명씩 시차를 두고 입장시키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우리 순서가 되어 드디어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을 흔히 겨울 궁전이라 부르는데, 실제 당시 여러 황제들과 그 가족들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렸던 권력의 현장이었다.

또한 일단의 청년들이 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예르미타지란 말은 프랑스 말로 은밀한, 감춰진 장소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곳이 공개되지 않은 궁궐이라는 뜻일 게다. 마치 우리나라 왕의 거처를 구중궁궐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18세기 중반에 건립되기 시작한 이 겨울 궁전은 네바 강을 따라 230미터나 길게 뻗어 있고, 천 개가 넘는 방과 2천 개가 넘는 창문, 그리고 지붕에는 약 170개의 조각상이 서 있어서 멀리서도 매우 이채롭게 보인다.

이곳은 제국의 몰락 이후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는데, 그 소장품의 숫자나 수준으로 볼 때 세계적 수준이어서 흔히 루브르, 대영 박물관과 함께 3대 박물관의 하나로 꼽힌다.

이 박물관은 겨울 궁전의 여러 건물, 즉 구예르미타지, 신예르미타지, 소예르미타지, 예르미타지 극장, 예비 보관소 등을 통로로 연결하여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으로 만들었는데, 여기 소장된 작품의 숫자만 해도 약 300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

이 작품들은 처음 예카테리나 여왕이 수집하기 시작한 것을 기반으로 기증 받거나 구입한 작품이 점점 늘어나고, 혁명 후 귀족들이 수집한 것을 국유화하면서 그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한다.

흥미 있는 것은 소장품 중에 출처가 불분명한 것은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원 소유자들의 반환 요구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작품들을 다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계산하기가 어렵다는데, 어떤 글에 보면 작품 하나 당 1분씩만 본다고 해도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고 하니 우선 그 압도적인 양에 기가 질린다.

가이드는 우리를 끌고 이 방 저 방 다니며 설명을 했는데, 다음에 갈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예약 시간 때문에 서두르고 있었으나 어차피 시간 지연이 되어 그 약속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군인의 방에는 역사상 유명한 장군들의 초상화가 벽에 죽 걸려 있었고, 그 다음 방부터 미술 책에서나 보았던 유명한 화가들, 즉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 루벤스, 렘브란트 등등의 작품들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내가 그림을 보는 안목이 부족하여 감동으로 그림 앞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린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도 ‘돌아온 탕자’, ‘로마 식 자비’, ‘아브라함의 제사’, 팔코네의 어린아이 조각상 등 몇 점의 그림과 조각은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그런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창조적 열정을 본받아 나도 좋은 글을 많이 써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충대충 돌아보았는데도 전시된 작품들 중 극히 일부만 볼 수 있었고, 또 여기 말고 다른 방에 전시되고 있다는 시기와 작가가 다른 작품들은 눈요기조차도 할 수 없었다.

하기야 수십 년 보아도 다 볼 수 없다는 작품들을 짧은 시간에 보려는 건 무식한 욕심이거나 만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일정으로 찾은 곳은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이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으나 이 도시로 유학을 와서 작품 활동을 하고 또 생을 마감했다.

그의 부친은 군의관이었으나 생활력이 부족해 자식들은 고생을 해야 했다. 모스크바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그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병 학교로 유학을 왔다.

여기서 젊은 시절의 객기로 일탈을 일삼던 그는 결국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글을 쓰기 위해 전역을 택하고 그때부터 그의 고난이 시작된다.

작품을 몇 편 썼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해 여전히 가난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진보적인 청년들과의 어울림이 발각되어 체포와 수사를 거쳐 사형 선고를 받는다.

처형 직전 황제의 칙령으로 사형은 모면하나 시베리아 유형으로 4년, 군대 복무로 4년을 보내야 했다. 이 도시로 귀환한 후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썼는데, “악령”, “백치”, “죄와 벌”, “카라마조프 형제들” 등의 작품들이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나아가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명작들이 되었다.

이런 문학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결혼 실패, 간질 발작, 알코올 중독, 도박 등으로 피폐해진 그의 인생에 헌신적인 그의 비서 출신 아내 안나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도 폐인처럼 망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후기 작품 대부분은 속기사였던 아내가 그의 구술을 받아 적어 완성되었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은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죄와 벌”의 무대였다고 하며, 어딘가에는 라스콜리니코프 집이라는 건물도 남아 있다고 한다.

박물관은 거리 중간에 있는 건물이었다. 입구는 반 지하에 있었는데 원래 도로와 나란히 있던 문이 도로 표면이 점점 높아지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를 기다리던 현지인 해설사는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아 매우 화가 나 있는 표정이었다. 겉옷을 벗어 맡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 건물은 그가 마지막 생애 10년을 보낸 집이다. 그의 소유는 아니었으며 세를 얻어 살던 집이라고 한다. 전시실은 그가 살던 집의 방을 그대로 이용해 만들었는데, 아내와의 사이에 낳은 네 명의 아이 중 일찍 세상을 떠난 두 명의 아이와 생존한 두 명의 아이 그림과 사진, 그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원고를 집필하던 책상, 메모지, 차를 마시던 탁자와 찻잔, 평생을 간직하고 읽었던 성경 등이 원래 그 자리에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영상 전시실에는 그의 작품 원고를 비롯해서 여행 기록, 활동했던 사진, 친지들과 주고받았던 편지, 읽었던 책 등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또 죽은 후 얼굴에 석고를 발라 만들었다는 그의 데스마스크가 있어서 비록 나라는 달라도 후배 작가된 입장으로 그 앞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명복을 빌기도 했다.

이 박물관에서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시실 방마다 자원 봉사자인지 유급 직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이 지긋한 여성분들이 한 사람씩 앉아 관람객이 전시물에 손을 대지 않는지, 금지된 사진 촬영을 하지 않는지 예리한 눈길로 감시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 표정에 대단한 자부심이 여실히 보이고 있는 점이었다.

그게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없으면 보이기 어려운 것이어서 이를 통해 이 나라사람들의 문화 의식을 엿볼 수도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단순히 19세기를 살다간 러시아 작가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으며, 그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수많은 작가들이 그를 본받아 창작에 열중하고 있다.

도대체 소설이라는 게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를 그는 작품으로 명징하게 증명해 냈으며, 작가가 사회와 시대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지식인의 표본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철학자 니체나 사르트르가 그의 영향을 받았노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 아니겠는가. 그의 작품은 읽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양이 많고, 또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문장 또한 길고 치밀하여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소설에서 성취해낸 결과는 헤아리기 어렵게 높고도 깊다. 웬만한 작가들이 기를 쓰고 따라가려 해도 그는 항상 한참 앞에 서 있다.

그의 소설이 모든 소설가들의 도달 목표가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깊이를 모를 심연과 같은 작품 세계, 그게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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