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0월 초사흘,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 산신당에서 태화산 산신제가 엄수됐다.

음력 10월 초사흘,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에서 태화산 산신제가 봉행됐다.

12일 오후 4시 동해리 산신당에서 거행된 ‘태화산 산왕대신 산신제’는 제관들을 제외하고는 부락민들조차 접근을 통제한 채 엄숙하게 진행됐다.

국태민안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위해 마련된 이날 산신제는 약 400여년 前인 조선 선조대왕 이전부터 전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해리 주민들은 그동안 ‘태화산 산왕대신’ 지방을 모셔놓고 매년 음력 10월 초사흘에 제를 올려왔으나, 5~6년 前부터는 산신탱화(山神幀畫)를 모셔놓고 제를 올리고 있다.

제를 올리는 유사는 제관1명, 축관1명, 집례1명, 공양주 1명 등 4명으로 이들 외에는 산신당 출입을 엄격히 제한, 신성시하고 있다.

또한 제관들은 10월 초하루부터 목욕제계해 몸을 정갈히 하는 것은 물론 누구와도 접촉을 피하고, 살생금지와 함께 부부간 합방조차 금지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해 제를 준비한다.

이곳 산신제는 조상 대대로 800kg 이상의 큰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있으며, 소가 쓰러질 때 땅에 닿은 부위는 제상에 올리지 않을 정도로 제물조차 까다롭게 엄선하고 있다.

더구나 산신당 가까이 접근하는 마을사람들조차 부정을 탈까 겁나 그날의 일진이나 때와 시를 분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외부인들은 절대 출입을 불허하고 있다.

이희성 동해리 5도2촌 주말도시 추진위원장은 “이곳 동해동 마을은 조선 태조 이성계에 반대하는 고려 충신들이 내려와 마을을 연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동학난 때는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이 피난해 살기도 했던 산골마을로 축문에서 그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씨는 이어 “이곳 산신당 터는 예로부터 ‘와룡동(臥龍洞)’으로 불러지던 신성한 곳으로 그 지명이 적힌 대들보가 산신당에 얹어져 있으며, 이 근처의 나무하나도 신성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동해동(東海洞)의 지명 유래

조선시대 초엔 와룡동(臥龍洞)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동해동엔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의 명당이 있다 하는데, 용에게는 물이 있어야 하므로 이곳을 순례하던 무학대사가 말하기를 “동해의 물을 끌어오면 된다”하여 마을을 동해동이라 부르게 하였다 한다.

동해리 산제당(東海里 山祭堂)은 동해리 산 중턱에 위치해 있으며, 古木이 우거진 암벽 아래에 祭堂이 있다.

山祭堂에서는 매년 음력으로 시월 초삼일이면 동리 주민들이 공동으로 돈을 걷어서 한우 한 마리를 제단에 바치고 온 마을 동민이 3일 간 목욕재계한다.

술· 담배· 고기· 어물 등을 먹지 않고, 살생을 하지 않으며 지내는 제사로 동민들이 진실로 지성을 드리는 제사다.

소는 12부위로 전체를 대신하여 쓰고, 제의 후 분배 때는 부위별로 나눈다. 이렇게 부위별로 나누는 것을 ‘주비끼’라 한다.

산신제를 지내기 전에 산신당 오른편 도깨비 바위에 메밀풀대를 해 놓는 의식이 특이하다. 옛날에는 이곳에 범이 자주 나타나 사람과 동물을 해치므로 사람들은 그 호랑이를 잡기 위해 산골마다 함정을 파고 호랑이를 잡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호랑이가 더욱 극성을 부릴 뿐 호랑이는 잡히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가 산신의 사자라 여기고 산제당을 짓고 산제를 지내면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산제당을 짓고 산제를 지냈는데 그 후로는 이
상하게도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이곳 동해동에는 무근골 북서쪽으로 두문동(杜門洞), 두멍골 마을이 있으며, 지형이 두멍같다 해서 두멍동이라고도 부르고 두문골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한 선비가 세상 돌아가는 것이 아니꼬아서 이 마을에 은거하고 세상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뜻에서 두문동이라고 부르며 삼밭을 가꾸며 살았다한다.

국사봉이라는 봉우리에 있는 바위를 말바위라 부르며, 바위가 흔들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에는 사람들이 다리를 만들어 붙인 적이 있다고 한다.

동해동 북서쪽 골짜기를 무근논, 무근골로 부르고 있으며, 마을에 묵은 논이 있었다 해서 묵은 논 또는 동전(陳田)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바깥 동해동 마을은 새마을 회관이 있는 마을로 안동해동과 구별되는 이름으로 현재의 동해리를 가리킨다.

까치 봉우리에 있는 바위를 벌바위라 하며, 아산시, 천안시, 공주시의 경계가 되는 지점이다.

동이점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범어골이라 하며, 예전에 이 골짜기에 사람이 살았는데 호랑이가 남편을 잡아먹었다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부인이 남편의 시체를 다른 곳에 매장시킨 뒤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산신당골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북나무골이라 하고, 북나무가 있는 골짜기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북나무는 안식향이라는 약재로 쓰이며, 이 나무의 진은 종기에 효과가 있다.

두멍골 북쪽으로 선학동 마을이 위치해 사락골이라고도 불리며, 이곳에는 작은 암자가 하나 있는데, 절이 있어서 즐거운 곳(寺樂)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안동해동마을은 바깥 동해동의 북쪽으로 동해동의 안에 자리한 마을이라 안동해동이라고 부른다.

작은삼밭골 마을은 큰삼밭골 남서쪽으로 삼밭이 있는 곳이었으며, 소마전(小麻田)이라고도 부른다.

제관동(帝官洞), 제왕골(帝王골)은 동해동 북쪽으로 풍수설에 동해리엔 四名堂 八大地가 있다 한다. 四名堂 중 괘등형(卦燈形)의 명당이 지금의 제관동 뒷산이라고 한다.

옛날에 나한치라는 위인이 그 명당 자리에 묘를 쓴 후 마을에 대장간을 차려놓고 칼과 창을 만들어 감추며 역적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극형에 처했는데 처형되던 날 괘등형의 산에서 검은 암소가 무릎을 꿇고 땅위로 올라왔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한다.

물론 땅 속에서 나온 검은 암소였다. 나한치가 조금만 운이 좋았더라면 세상을 크게 호령하였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검은 암소가 땅 속에서 나온 그 자리에 숯을 묻고 사기를 묻었다. 다시는 역적모의가 없도록 예방한 것이었다. 제왕이 나올 형국이라 하여 帝王洞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지새골은 큰삼밭골 동쪽으로 지형이 뒤로 젖혀져 있으며, 참새골은 두멍골 동쪽 부근의 골짜기로 차가운 샘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찬샘골에서 변형된 지명이다.

큰삼밭골은 동이점 서쪽으로 커다란 삼밭이 있는 곳으로 여기서 나는 삼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하며, 대마전(大麻田)이라고도 부른다.

성계동(聖溪洞) 마을은 자근골 동쪽으로 마을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내가 흐르는 마을이다. 냇바닥이 모두 바위로 되어 있어 흐르는 물이 聖水처럼 깨끗한데 깨끗한 계곡에 맑은 물이 흐르는 마을이라 성계동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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