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바위

-제민천 개바위에 얽힌 전설

제민천에는 자기를 돌봐 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다 죽은 개의 넋이 소생해서 바위가 되었다는 다음과 같은 「개바위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백제 제23대 동성왕(東城王) 때* 서울인 웅진(雄鎭) 시내에 ‘비룡(飛龍)’이란 개가 있었다. ‘비룡’은 김이달(金伊達)의 집에서 기르는 개로 매우 영리하고, 슬기로운 점에 있어서 사람도 능히 따를 수 없었다.

비룡은 언제나 충성을 다하여 큰 귀여움을 받았고, 주인이 집을 나고 들 때마다 쫓아다니며 보호하곤 했다. 주인 김생(金生)은 성품이 어질고 덕이 있어 늘 남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한편 이웃 사는 박제운(朴提雲)이란 사람은 살림이 어려워 김생이 물질적으로 많이 도와 주었다. 김생은 박생(朴生)에게 쌀이 떨어지면 쌀을 주고, 옷이 없으면 자기가 입던 옷까지 벗어주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박생은 원체 게을러서 자기 힘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느 날 김생을 찾아 온 박생이 “식량이 떨어졌으니 좀 꾸어주고, 옷이 다 떨어져서 곤란하니 한 벌만 빌려주었으면 하네.”라고 하였다. 박생은 당연하다는 듯 미안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빌려달라는 것은 말 뿐, 갚는 일이라곤 없었다.

아무리 어질고 착한 김생이라 해도 불쾌하게 생각한 김생은 박생의 청을 들어 주시 않았다. 그리고 이웃 이생(李生)이란 사람을 불러 박생의 인간성이 틀렸음을 이야기했다.

“돌봐주어도 끝이 없음은 물론 더욱 게으름만 피우니 나도 이제는 박생을 더 보살필 수는 없는 처지여서 그의 청을 거절했네. 자네보고 이야기지만 아 글쎄 박생은 늘 맘의 물건은 훔칠뿐더러 남에게 의존만하니 인간이 틀려먹었네. 며칠 전에도 이웃집 물건은 훔치는 것을 보았는데, 이런 일은 한 두 번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으니 낸들 그런 사람을 도와주어서 무엇 하겠나.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자네보고만 말하는 것이니 아무보고도 입에 내어서는 안 되네.”

듣고 있던 이생은 깜짝 놀랐다. “박생이 자네 덕을 많이 보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도적질까지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일세.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의 마음속은 모른단 말이 이런데 두고 한 말이네 그려.”

이생은 김생의 말을 듣고 놀랐으나 한편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곧 박생의 집으로 달려가 김생이 하던 말을 전부 쏟아 부었다. 이 말을 듣던 박생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눈은 김생에 대한 적개심으로 꽉 차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김생과 박생의 거래는 그치고 말았다. 김생은 세상일이란 열 번 잘하다 단 한번만 틀려도 모두 허사임을 절실히 느꼈다. 김생은 기분전환도 할 겸 어느 날 여행을 하고 돌아 올 계획으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웬일인지 김생 집 개 비룡은 옷을 물고 잡아 다니며 출타를 막는 것이었다. 김생은 그래도 뿌리치며 개를 쫓아 버리고 떠났다.

얼마를 걸어가다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즈음 비룡이 울부짖으며 비호처럼 달려와 김생의 옷을 물고 필사적으로 끄는 것이었다. 김생은 끄는 대로 따라갔다. 얼마 가다가 큰 비명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개가 옷을 물고 잡아 다니던 지점에서 지나가던 소와 사람이 한꺼번에 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급히 달려가 보니 깊은 함정이어서 속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들어가 구해낼 방법도 없었다. 그 소와 사람은 마침내 비명에 죽고 말았다. 개가 아니었던들 죽었을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하였다.

비룡은 여행하는 동안 늘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며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였고, 김생은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박생이 찾아와 반색을 하며 “그동안 많은 신세를 졌는데, 그 은혜를 갚지도 못하였으니 미안하도, 나도 이제 차츰 살게 되었으니 김생의 덕인가 하오. 언젠가는 갚을 날이 있을 것이오.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 오셨으니 축하 겸 한잔 내겠소. 시외 조용한 집으로 갑시다.”

김생은 박생의 호의를 고맙게 생각하며 저녁에 집을 나섰고, 비룡도 따라 나섰다. 어느 골목길에 다다르니 개가 땅을 두 발로 마구 파며 낑낑거렸다.

김생은 이상히 여겨 가까이 가보니 나무상자가 나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자기 입에서 음식을 먹으면 70년간을 잘 살 수 있으나 남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면 천년 이상 영원히 모든 것을 잊고 살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김생은 기이한 일로 생각하며 박생이 자기를 초청해 준데 대해 퍽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늘이 자기를 돕는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글 내용이 퍽 좋으나 “천년이상 영원히 모든 것을 잊고 잘 살 수 있다”는 뜻은 잘 이해가 안 갔다. 다만 자기가 천년이상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임의해석하며 기뻐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약속한 술집에 다다르니 박생은 이미 와 있었고, 진수성찬으로 술상이 마련됐다. 김생은 박생과 유쾌한 기분으로 정담을 나누며 거나하게 술이 취했다.

한참 술을 마시다 김생이 변소에 간 사리 박생은 무엇인가 술집여자의 귀에 대고 속삭이더니 이윽고 그 여자가 무엇인가 가져다가 김생의 술잔과 그가 먹을 밥에다 섞는 것이었다.

변소에서 돌아온 김생이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비룡이 울부짖으며 덤벼들어 옷을 물고 못 들어가게 했다. 영문을 모르는 김생은 그래도 뿌리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막 술잔을 들어 마시려는 순간 개가 들어와 술상을 뒤엎고 음식 그릇을 물어다 마당에 버리는 것이었다.

이때 닭들이 덤벼들어 마당에 흩어진 밥들을 주어먹었다. 그런데 그것을 먹은 닭은 모두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곤 하였다. 이때 김생은 위기일발에서 생명을 건진 것을 깨달았다.

“천년 이상 영원히 모든 것을 잊고 잘 살 수 있다”는 뜻도 비로소 알게 됐다. 즉 죽어버리면 모든 것을 잊고 잘 살 수 있음은 너무도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박생이 김생을 죽이려고 술집여자와 결탁해서 꾸며낸 연극이었다. 실은 김생이 여행을 떠날 때에 길목에 함정을 파놓는 것도 박생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박생은 이밖에도 갖은 방법을 써서 김생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슬기로운 비룡으로 말미암아 실패로 돌아가곤 했다.

따라서 온 시내는 비룡의 이야기로 큰 화제가 됐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날 김생은 친구 대 여섯 명과 같이 이웃으로 마실을 갔는데, 갑자기 소나가기 억수같이 쏟아져서 제민천은 온통 흙탕물 바다가 됐다.

김생 일행은 이 내를 건너야만 집에 올 수 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게 됐다. 그런데 예상외로 물살이 세고, 깊어서 그들은 모두 휩쓸려 떠내려갔다. 이 광경을 본 비룡은 날쌔게 뛰어들어 김생의 일행 오륙 명의 생명을 구했으나, 비룡은 그만 숨지고 말았다.

죽은 자리에 그 원혼이 바위가 됐다고 한다. 지금도 내 가운데 외로이 물소리를 벗 삼아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시내 남쪽 오통 거리에서 제민천을 따라 약 이백 미터 가량 현 교육대학 쪽으로 가면 내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속칭 ‘개바위’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비룡의 화석인데 김생은 자기를 살리고 숨진 것을 생각해 애통하여 매일 같이 그 바위를 찾아가 울고, 봄가을이면 꼭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그 개바위는 고사를 지내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게 하면 모든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구중회 (1994), 공주민속, 공주문화원)

제민천 관련 역사 기록 및 기타 기록

홍수가 나면 금강이 범람한다. 그리고 금강이 범람하면 제민천도 범람한다. 최고의 금강범람기록은 동성왕 13년(491) 여름 6월 ‘웅천의 물(熊川水)이 넘쳐 왕도(王都)의 200여집이 표몰(漂沒)하였다’고 돼 있다.

이어 497년(동성왕 19) 여름 6월에도 역시 민가가 떠내려가는 큰 홍수가 있었다. 홍수로 금강물과 함께 제민천이 넘쳐 시내가 물바다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인 1547년 홍수로 금강물이 불어 광아와 민가가 무너지고 보름동안 침수되었다. 1723년에는 민가 1,000여호, 1823년 100호, 1839년 489호가 파괴되었던 기록이 있다. 17세기에는 한 때 제민천변에 설치했던 충청감영의 관아도 홍수 때문에 공산성으로 옮겼다가, 종내 지금의 공주사대부고 자리를 새로 조성해 감영을 옮겼다.

일제시대인 1926년과 1936년에는 대홍수가 있었다. 이 때 제민천 뚝이 무너져 시내가 침수되는 바람에 1,000여호가 물에 잠겼다.

1946년 홍수는 ‘병술년 물난리’로 유명하다. 대통교 인근까지 물바다가 되었다는데, 당시 금강물로 산성동과 금성동의 제방이 무너지과 격류가 공산성 서문 앞 능선을 쳐서 많은 토사가 유실되었다고 한다.

1919년 매일신보에는 ‘공주에 와서 제일 부러운 것이 맑은 냇물이다. 준공된 지 얼마 안 된 석축은 화강암에 서슬이 아직 마멸되지 아니하여 보는 눈을 상쾌하게 하며, 하상(河床)에는 반석을 깐 중앙으로 유유히 한 줄기 맑은 물이 밤낮없이 북류(北流)하니, 그 정결함은 산간의 냇물보다 못할 것이 없다.

더욱이 이른 아님 안개 낄 때에 물고기 한 때가 꼬리를 저어가며 헤엄치는 모양과 한적한 한낮에 물소리를 듣는 취미는 일종의 시(詩)라 하겠다’는 글이 실렸다. <출처> 윤용혁-제민천, 공주를 살려온 역사의 강 (2014, 금강문화포럼)

이처럼 제민천에는 ‘개바위’에 관한 전설과 역사적인 기록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를 얼마든지 스토리텔링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이야기가 넘치는 제민천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어떠한 대상에 의미를 담아주면 그 대상은 새롭게 태어난다.

그런데 개바위는 안타깝게도 지금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제민천은 2000년 이후 오영희 시장 재임시절에 한 번, 이준원 시장 재임시절에 두 번 등 총 세 번의 공사를 했다.

이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오영희 시장 재임시절에 제민천 공사를 할 때에는 윤완중 전 시장의 지시로 개바위에 손을 대지 않았지만, 이준원 시장 재임시절 제민천 공사를 하면서 깨 부셔버려 지금은 어렸을 때 거기서 놀던 사람도 개바위가 어디에 있었는지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당시 개바위가 있는 곳은 바위가 있어 물이 돌았고, 제민천의 다른 곳보다 깊어 여름철이면 학생들이 목욕을 하곤 했다고 한다. 개바위 전설을 신빙성 있게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에 개바위가 있었는지를 알아보기도 힘든 형국이 돼 버렸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차마 금할 길이 없다.

고려청자를 가지고 있어도 자기가 가진 고려청자가 국보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개밥그릇으로 사용한다면, 그것도 사용하다가 깨버린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어떤 방법으로든 개바위는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주는 개도 충성스러운 고장임을 알리기 위해서는.
 

*백제 23대왕은 삼근왕으로 재위기간은 477년부터 479년까지이며, 백제 동성왕은 24대 왕으로, 재위기간이 479년부터 501년까지 22년이다. 따라서 동성왕으로 기록된 점, 재위기간 등을 볼 때 24대왕을 23대왕으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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