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에 골동품을 보면 좋아서 무조건 사두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헌 바가지를 하나 들고 와서 “이 바가지는 요임금이 자신의 보위를 허유에게 양위하겠다”고 하는 말을 하자 허유가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씻어버리겠다고 했을 때 사용한 바가지”라 하니 거금을 주고 사들입니다.

그 소식을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어떤 사람이 이번에는 허름한 방석 하나를 가지고 와서 “이 방석은 공자님이 곡부의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앉으셨던 방석”이라 하니 두말할 것 없이 남은 재산의 절반을 주고 사들입니다.

다시 며칠 후에 어떤 사람이 지팡이를 하나 가지고 와서 “이 지팡이는 장자방이 스승의 병이 나서 그 병을 고치러 다닐 때 타고 다녔던 지팡이”라 하니 그는 남은 재산을 다 걷어주고 지팡이를 삽니다.

결국 골동품에 눈이 돌아버린 그 사람은 쪽박은 들고, 방석은 옆구리에 꿰고, 지팡이를 짚고 거리를 다니게 되는 데, 영락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 꼴 모습이 되니 동네 사람마다 손가락질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답니다.

차라리 그 돈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조금씩 나누는 일을 하면서 여유자금은 정당한 방법을 써서 불려 나가는 것을 즐겨하면 좋았을 것을 돈의 가치를 올바로 사용할 줄 모르는 무지 앞에서 골동이 값나간다는 말만 믿고 무조건 사들인 과보입니다.

‘호고파산 (好古破産)’이라 불리는 이 이야기 속에는 무언가에 탐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또 그 집착으로부터 헤어 나오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우리들에게 일러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골동품이 값나가는 물건인줄은 알면서 그 골동품의 진가眞假를 바로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이의 맹목적적인 집착심을 말하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어디 골동만 그런가요? 권력, 명예, 부귀, 재물, 명품, 이성 등 우리가 탐닉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눈멀고, 귀 먹게 하는 대상일진대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 자신들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물건뿐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눈도 있어야 상대에게 속지 않고 실망도 덜 하게 됩니다. 입에 혀처럼 굴면서 갖은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낯빛을 바꾸고 적이 되는 시대를 살면서 누구를 믿어야 되는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참으로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흔히 그런 일을 겪는다지만, 나로서도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사람을 겪어 보면서 비슷한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모두 상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귀가 얇고, 생각이 바르지 못한데서 온 자승자박이요, 자업자득인데 어리석은 생각으로 여전히 남을 원망하고 탓하고만 있었던 것임을 늦게 깨닫게 됩니다.

내가 있었기에 일어 난 내 탓일 뿐, 결코 상대를 원망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자기를 책망하고 바로 고치려 않고 세상과 상대를 원망하며 그 분과 한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풀이하고, 분풀이 하느라 다시 한 번 어리석은 짓을 더 하게 됩니다.

속인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엄밀하게는 속은 사람이 더 나쁜 것이니 그 속는 자리에는 무언가 작은 욕심이 도사려서 잘못된 이익을 취하려 하였으니 생겨난 것임을 얼른 알아채고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그나마 실패를 통해서 배운 바가 있다 할 것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이 세 가지는 결코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삼신일체가 되어서 함께 굴러 가는 것이니 굳은 마음으로 일단일체단 할 수 있는 방법이 그 삼독심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번뇌가 보리요, 생사가 열반이라 하시는 것이지요. 가만히 생각하면 일갑자 긴 시간동안 채워지지 않는 욕심덩어리 몸만 가꾸어 왔고, 그 몸의 주인공인 마음 닦음은 소홀하였음을 삼보전에 두 손 모아 참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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