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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 길, 남산을 만나다(2)
정기범의 역사산책-6
2016년 03월 28일 (월) 14:22:47 정기범 기자 jkb4412@daum.net

   
 

숭례문부터 진행된 답사는 남대문 시장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서울투어는 표석으로 역사 공부를 하는 재미도 솔솔하다.

숭례문 정문에서 남서쪽 방향에는 남지(南池) 표석이 있다. 그 오른쪽으로 뻗어 있는 도로가 칠패로(七牌路)이다.

'칠패'는 조선후기의 군사조직인 5군영이 한성부 전 지역의 순찰을 담당하던 8패의 부대를 두었는데 이 지역은 8패 부대 중 하나였던 7패가 관할했던 지역에서 유래됐다.

조선 후기의 군대는 한양을 방어하기도 하지만, 일부 병력은 생계유지를 위해 수공업에 종사하기도 했고, 생산된 물건을 별도로 판매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이앙법(모내기법)이 보편화 되게 된다. 이앙법은 생산력은 높지만, 가뭄에 취약해 나라에서 금지해왔다.

그러나 점차 수리시설의 발달로 확대됐으며, 직접 씨를 뿌리는 직파법보다 김매기 작업에 유리했기 때문에 노동력이 절감, 많은 소작농이 필요 없게 됐다.

한 사람이 넓은 면적을 농사짓는 것을 '광작'이라 불렀다. 광작의 유행으로 숙종 임금 이후로는 지방에서 소작지를 구하기 힘든 많은 유민들이 서울 주변으로 몰려 들어오게 됐고, 자연적으로 7패 관할에 시장이 생기게 됐다.

공납(특산물을 걷던 세금)이 미곡으로 받는 대동법으로 바뀌고 나서 걷은 미곡을 보관하는 창고의 역할을 하던 선혜청이 있던 곳에 칠패시장이 확대되어 남대문 시장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남대문 시장 안에 있는 남창동과 북창동의 유래도 선혜청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어 지어진 동의 이름이라고 한다.

한양에 도성을 세우고 난 뒤 정종1년 1398년부터 태종 때 까지 보신각에서 종묘까지 행랑 2,000칸을 짓고 육의전을 비롯한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는 시전(市廛)을 두어 시장으로 사용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한양도성 외부지역으로 인구집중 현상이 벌어지면서 남대문과 서소문밖으로 17세기 이후로 상가가 형성이 되어 이것이 칠패시장으로 이름이 굳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상업의 규모가 커지자 배오개 지역 (현 종로4가 지역)에 정부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는 사설시장 형태인 이현시장이 형성된다. 칠패시장은 주로 노량진 등 한강지역에서 유입되는 어패류를 다루었고 이현시장은 동대문 밖의 지역으로부터 재배되는 채소나 곡물을 주로 취급했다.

이들 칠패와 이현시장에서 활동하는 사상(私商)들은 점차로 독점적 상인으로 성장하여 상업자본을 축척시키며 조선사회에 자본가의 형태인 경강상인, 송상, 만상, 내상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즉 조선 전기의 국가 관리체제에서 유지되어 오던 독점적 시전의 형태에서 후기로 넘어오면서 사상(私商)이 경제를 주도하게 됐고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것을 '자본주의의 맹아(萌芽)', 쉽게 말하면 '자본주의의 새싹'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을 위한 이들의 노력은 일본과 청나라의 외세 자본에 의해 크게 좌절을 맞게 된다. 청나라 상인들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됨을 계기로 칠패시장으로 상권을 넓혔다.

특히 일제는 남산과 명동일대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칠패는 남대문시장으로 성장하지만 일본인을 위한 시장으로 크게 왜곡되게 됐다.

이러한 일제의 시장 잠식에 대항하여 이현시장은 광장시장으로 조선 상인들이 만들어 대항을 해 보지만 일본 제국주의 자본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시전과 칠패, 이현시장이 조선시대 한양의 3대 시장이었던 셈이다.

힐튼 호텔을 지나 남산공원으로 올라섰다. 힐튼호텔을 지나며 조선시대 3대 시장이었던 칠패시장의 북적거림을 상상해 본다.

한 때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재계 3위였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허망한 세월도 동시에 스쳐 지나간다.

남산 공원에 들어서니 많은 동상들이 있다. 김유신 장군의 동상도 눈길을 끈다. 도대체 왜 남산에 생뚱맞게 김유신 장군이 있는 걸까? 경주 남산이랑 자매결연이라도 맺은 걸까?

그런데 이러한 동상들은 박정희 정권 시기에 유행하였는데 많은 재벌들이 동상을 기탁하여 뒷면에 보면 기탁자의 이름이 씌여져 있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원래 광화문에 세워졌었으나, 교통흐름의 방해로 이 곳 남산으로 옮겨져 왔다고 한다. 쌍용그룹 김성곤 회장이 만들어 기탁한 것인데,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이 군인 출신이었기에 무인들 동상들이 많이 세워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성재 이시영 동상도 눈에 들어온다. 이시영은 백사 이항복의 10대 후손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다섯째 아들로 국권 피탈 후 4째 이회영의 주도아래 명동지역의 가산을 정리하고 40명의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경학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리고 구한말 외교부 교섭국장, 헌법재판소 소장, 평안감사, 상해 임시정부에서 법무, 재무총장을 역임했다. 광복회 신흥대학(현 경희대)을 설립하고, 1948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이승만의 통치 방식에 반대했다.

이시영은 형인 우당 이회영과 더불어 일제의 감언이설에도 흔들리지 않고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투자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여섯 형제로 후대에 회자되고 있다.

경주 이씨 상서공파로 직계조상인 이항복 이래 10명의 정승을 배출한 조선의 대표 명문가로서 어마어마한 부를 소유했던 그들 역시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인해 나라를 잃긴 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호의호식하며 편하게 살 수 있는 기회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시기의 다른 명문세족들과 다르게 행동했던 점은 나라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원래 노블레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블리제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음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리스)만큼 의무(오블리제)를 다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내가 가진자였다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하며 백범 동상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 일행은 백범동상 앞에서 묵념을 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25m 초대형 동상이 있었던 자리였으나, 4.19 혁명 후 동상이 철거되고 1968년 8월 백범광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광복절과 건국절의 논란 속에 국부 추앙론 까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대사 역사 논쟁. 무엇이 바른 역사관일까를 일행들과 또 한 번 토론했다. 많은 동상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장의 이름은' 백범'으로 불리고 있다.

   
 

백범 광장을 뒤로하고 남산 쪽으로 발걸음을 더 옮기면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1970년에 세워진 안중근의사 숭모회에서 운영하던 구 기념관을 철회하고, 2010년 10월 26일 개관했으며,  6개월 동안의 옥중에서 쓴 유묵(遺墨)과 자서전등 유품 등이 진열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하면 문득 ‘지바 도치시’라는 인물이 떠오른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 있을 때 간수로 있었던 사람이다.

온고지신방랑객은 한 때 일본 혼슈(本州) 북부 미야기(宮城)현 구리하라(栗原)시에 있는 대림사(大林寺. 다이린지)라는 절을 찾아갈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답사 여행계획을 세우고 있을 즈음 일본 후쿠시마 방사능 사고가 터져 아직 인근에 위치한 대림사에 가보지 못했다.

대림사는 얼핏 보기에는 특별할 것도 없는 작고 아담한 시골의 절로 보여 진다. 그러나 이곳에는 놀랍게도 아주 특별한 분이 모셔져 있는데, 이 절에 가면 오른쪽에는 안중근 의사, 왼쪽에는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씨 부부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에서 일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분인데 그런 안중근 의사의 위패가 왜 일본의 절에 모셔진 것 일까?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일본군 헌병이었던‘지바 도시치’라는 사람이 그곳에 근무했다고 한다.

그도 처음에는 일본에서 추앙하는 이토오 히루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에 대하여 ‘테러리스트’라며 분노하고 경멸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점차 안중근 의사가 동양 평화를 갈구하는 굳은 의지와 높은 인품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감명을 받게 됐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두 사람은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형수와 감옥 간수, 카톨릭 신자와 불교도라는 장벽을 넘어 서로 존경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안중근 의사는 결국 교수형으로 32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사형 집행 전 안중근 의사는 마지막으로 지바 도시치 씨에게 “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 위해서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라고 쓴 필묵을 선물했다고 한다.

눈물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지바 도시치 씨는 군대에서 제대한 뒤, 고향 센다이에서 철도원으로 일하면서도 평생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모시며 그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가슴에 품은 뒤 우리는 기념관을 뒤로 한 채 본격적 남산 등산 길에 오른다.

   
 

마침 이 글을 쓰는 날이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신 날이라니 적도 감동 시켰던 그 분이 존경스럽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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