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눈도 수북하게 내렸다. 3월 1일 온고지신방랑객이 운영하는 네이버 밴드 회원들과 한양성곽 답사를 약속했기에 회원들과 약속한 남대문으로 불리는 숭례문으로 향한다. 이 계절에 한 번씩 꼭 찾아오는 꽃샘 녀석이 얄밉다.

숭례문은 국보 제1호다. 이는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단순지식이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현재 숭례문의 모습은 2008년 겨울, 토지보상 문제에 대해 불만에 찬 한 노인의 방화로 어이없게 성석(城石)부분만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소실됐다. 복원과정에서도 부실공사 논란으로 또 한 번 아픔을 겪었다.

어떤 이는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켰던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동대문을 통해 한성으로 쳐들어왔는데, 일제가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존한 까닭은 문화재적, 미술사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일본 승전의 관문’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했다.

화재로 문화재적 가치가 훼손됐고, 일제가 의도한 바가 있어 살아남은 문화재이기에 문화재의 대표 격인 국보 1호로 타당치 않다는 여론이 들끓기도 했고, 국보 1호는 훈민정음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과 서명운동도 벌어졌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이에 “국보 1호가 국보 1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화재에 번호를 매긴다는 것이 문화재 가치의 서열을 판단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에 번호기를 매기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번호가 중요도 순이라는 느낌이 들기에 지정번호를 없애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러한 발단이 된 것이 숭례문이기 때문에 마음이 짠했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숭례문은 오랫동안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한양도성의 정문의 역할을 해왔다.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진격해왔을 때도 숭례문은 묵묵히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일제의 전승기념으로 남겨야 할 건물이라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6․25가 일어났을 때에 피난민들의 행렬에도 그 자리를 지켰고, 그 총탄의 상흔까지 간직했는데, 그러한 숭례문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어 마음이 아프다.

모든 잘못은 우리가 저질렀는데, 꼭 그 잘못을 문화재인 숭례문에 투사하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다 화풀이 하는 격은 아닌지 모르겠다.

숭례문은 다른 사대문과 달리 현판이 세로글씨로 써 있다. 이에는 ‘1394년 태조가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성곽을 지을 때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관악산이 화산(火山)인 까닭으로 인해 불의 기세를 억누르고 경복궁을 지키기 위해 불이 타오르는 형상을 세로글씨로 써서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불에는 불, 맞불 작전이었던 셈일까?

숭례문의 현판의 글씨를 누가 썼느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신동국여지승람』등 기록에 따라 태종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이 썼다는 설이 유력하게 퍼져있다.

구한말 일제로부터 외교권이 박탈당했던 때인 1907년 일본의 황태자가 방문할 때 숭례문 문루 밑으로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여 문루 양쪽 연결된 성곽을 부수어 버렸다.

그 후 전찻길과 도로가 새로 개통되고, 한일병합 후 성곽에 대한 관리의 소홀과 일제의 의도 속에서 숭례문에서 서대문 방향과 남산 쪽 방향의 성곽들은 대부분 소멸됐다.

광복이후에도 도시개발과 더불어 훼손된 구간이 많다. 이렇게 원형이 훼손된 구간은 오늘날 다시 복원 정비되고 있다.

이러한 숭례문의 아련한 아픔을 뒤로한 채 우리는 남산으로 향했다.

남산의 지명유래를 보면 ‘목멱(木覓)’이라고도 불렀는데, 남산의 이름은 원래 ‘마뫼’였다고 한다. 마뫼의 ‘마’는 ‘앞’, ‘뫼’는 산의 우리말이다.

독립지사이자 역사학자였던 안재홍에 따르면 목멱은 이두식 표현이다. 목은 ‘마’를 멱은 ‘뫼’를 적었다는 얘기다. 즉, 남산=앞산=마뫼=목멱이며 같은 뜻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온고지신방랑객의 고향집 앞산 이름도 남산이었다. 어렸을 때 남산 중턱에는 나무를 베어낸 마치 마당 같은 공터가 있었는데 그 곳이 신사 터였다고 한다.

역사를 잘 몰랐던 시골소년 시절에는 그런 아픔을 모른 채 ‘신사당’이라고 불려 졌던 그곳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놀던 것이 마냥 좋았다.


오늘날 남산하면 서울의 랜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서울타워와 케이블카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마침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과 만난다. 시간여행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벼슬길 진출을 위해 ‘열공’하던 딸깍발이 선비와 그들이 살았던 남촌 풍경도 떠오른다.

다시 근대로 거슬러 오면 남산 아래 명동 거리는 진고개 신사가 거닐던 곳이기도 하다.

진고개라하면 충무로와 명동을 잇는 고갯길을 말하지만, 예전에는 진흙길이어서 살기에 불편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들어온 중국인과 일본인이 번갈아가며 명동 주변에 상권을 형성했다.

이 곳에는 서양식 문화가 가장 먼저 상륙, 백 바지에 데모테 안경과 맥고모자를 쓰고 백구두를 신었을 서양식 멋쟁이가 활보했을 터이니 일명 이들을 ‘진고개 신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최희준씨의 노래 ‘진고개 신사’를 콧노래로 흥얼거려 본다.


그 흥얼거림도 잠시 남산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심어놓은 아픔이 있다. 시간여행을 다시 오늘날로 더 다가오면 옛 중앙정보부 등 스산했던 다양한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

남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분수대가 있던 자리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신궁을 세웠다. 조선신궁을 통해 일제는 우리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하려고 했다.

남대문 대로에서 남산 쪽으로 향하는 참배용 길을 냈으며 현재의 하얏트 호텔로 연결된 동쪽 길(소월길)과 퇴계로 방향의 리라초등학교 방향의 서쪽길(소파길)도 이때 만들어졌던 것이다.

하늘 천(天)자 같은 문양의 조선신궁 대문은 하늘에서 보면 조선총독이 머무르던 현 청와대쪽과 광화문의 조선총독부, 현재 시청 자리의 경성부청이 ‘대일본’이라는 글자의 모양으로 설계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조선은 대일본제국을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한다는 사상을 영원토록 심고자 한 의도였으리라.

조선신사에서 오른쪽으로 현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 건물 오른쪽의 계단을 내려가 소파 길을 따라 내려가면 숭의여자대학교와 예전 KBS가 있던 자리에 남산 애니메이션 센터가 위치해 있다.

이 일대는 1905년 일제가 외교권을 박탈하고 우리나라를 지배하였던 조선총독부(구 조선통감부)가 1926년 경복궁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역사를 통해 배웠던 1921년 의열단 김익상이 이곳 조선 총독부에 폭탄을 던졌었다. 이 곳 조선총독부의 옛 자리 뒤편에는 한때 이토오 히로부미가 머물던 총독관저(구 통감관저)가 있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녹천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곳인데, 1910년 8월 22일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조선의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기도 하다.

통감관저는 일본공사관의 이동과 연결돼 근대사의 격변사건과 연관되어 진다. 일본공사관은 1876년 강화도조약체결이후 서대문밖에 위치했었지만, 1882년 임오군란 때 구식군대의 공격에 의해 불타버린다.

이에 새로이 현재 천도교 중앙대교당 옆인 박영효의 집을 사용하였는데 이 또한 1884년 갑신정변 때 불타 버린다.

1885년 다시 남산 중턱으로 자리를 옮겨 짓게 되고 1905년에는 일본 공사관에서 조선통감부로 명칭이 바뀐다.

1910년에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면서 총독관저로 사용하다가 1939년 현재 청와대자리인 경무대 총독관저를 신축하며 자리를 옮겼다.

“이 번 한양도성 남산구간 순성길에 숭례문으로 향하던 무거운 발걸음을 웃음 가득으로 바꾸어 보려는 노력 때문이었을까? 바람도 잦아들고 날씨가 화창하다. 과연 긍정은 긍정을 낳나보다.


한양 성곽은 크게 태조, 세종, 숙종 때 신축 또는 증축하면서 보완됐다. 전체적인 윤곽은 태조 때 형성이 됐는데, 태조5년 (1396년) 한양성곽을 축성했을 때 전체 59,500척 (약18킬로미터)을 600척씩 모두 97개 구간으로 나눈 후 전국의 군현을 지정하여 군민을 동원하여 해당구역에 그 지역사람들이 성을 쌓도록 했다.

당시 118,000여명의 공사 인원을 동원하여 북악산 정상에서 하늘 천(天)자로 시작해 오른쪽으로 돌아 인왕산을 지나 마지막에는 조상할 조(弔)로 끝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북악마루에서 숙정문까지의 9개 구간은 함흥 쪽의 동북면 주민, 숙정문에서 혜화문까지는 강원도 주민, 혜화문에서 숭례문까지는 경상도 주민, 숭례문에서 돈의문까지는 전라도 주민, 돈의문에서 백악마루까지는 평안도 주민을 동원하여 성곽을 지금의 구간대로 쌓게됐다.

세종4년에는 32만명을 동원하여 성곽을 견고하게 증축하였고 숙종30년(1704년)때는 민간인이 아닌 5군영의 군사를 동원하여 60센티 가량의 정사각형 돌을 틈새 없이 튼튼하게 쌓았다.

특히 남산 방면의 성곽자체를 유심히 살펴보면 각자성돌이 남아 있는데 ‘각자성석(刻字城石)’이란 성곽 돌 가운데 도성축조에 관련된 글을 새겨 놓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공사실명제’와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각자성석은 성을 쌓을 때에는 일부 성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태조 · 세종 때에는 구간 명 · 담당 군현명 등을 새겼고,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 · 책임기술자 · 날짜 등을 명기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인 것이다.

“세계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도성의 기능을 유지한 곳은 어디였을까? 한양도성 600년의 역사 숨결이 살아 있는 순성 길에서 남산의 이야기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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