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헌 향토문화연구회장은 “취리산의 회맹은 바로 이 같은 미묘한 시기에 당나라에 의해 준비된 일종의 정치적 행사였다”고 설명했다.
물론 신라는 백제의 부흥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회맹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점을 들어 강한 반발을 보였지만, 강권으로 이를 설득한 당나라는 마침내 665년 8월 유인원의 입회하에 부여 융과 신라 문무왕으로 하여금 화친을 맹세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의 회맹문은 ‘삼국사기’에 전문이 실려 있으며, 이는 당나라 장수인 유인원이 지은 것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웅진도독 부여 융으로 하여금 백제 선왕들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옛 강토를 보전하게 한다. 나제 양국은 이후 서로 화친하여 환란을 서로 구하고, 형제처럼 도우며 지낼 것을 하늘에 맹세한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취리산에서 나제 양국은 화친의 맹세를 하게 된다. 그 약속의 징표로 백마를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고 제물을 제단의 북쪽에 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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