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 북쪽에 위치한 취리산. 현재 그곳은 해주 오씨 묘역이 조성돼 있다. ⓒ 특급뉴스 오희숙취리산(就利山)은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 북쪽에 있는 해발 52.4m의 낮은 산이다. 이 산은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신라 문무왕 5년(665)에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입회하에 백제의 왕자로 웅진도독에 임명됐던 부여 융과 신라 문무왕간의 동맹서약을 맺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한지 5년이 되는 665년 공주 취리산에서 백제와 신라의 회맹(會盟)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있다. 이미 알고 있듯이 나당연합군은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연합해 일단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연합은 그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백제를 멸망시킨 후, 이에 따른 양국사이의 갈등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됐다.이러한 과정에서 한반도의 지배를 획책하고 있던 당나라가 신라를 견제하면서, 동시에 백제 부흥운동을 무마·회유할 목적으로 회맹을 추진했던 것이다.▲ 회맹단지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 특급뉴스 오희숙
당나라는 이때, 포로로 잡아갔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 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해 백제유민의 치열한 부흥운동을 희석시키고, 아울러 백제 고토(故土)에 대한 부여융의 통치권을 일시 보장해 주는 듯했으나,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던 신라를 견제하고자 한 제스처였다.

윤여헌 향토문화연구회장은 “취리산의 회맹은 바로 이 같은 미묘한 시기에 당나라에 의해 준비된 일종의 정치적 행사였다”고 설명했다.

물론 신라는 백제의 부흥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회맹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점을 들어 강한 반발을 보였지만, 강권으로 이를 설득한 당나라는 마침내 665년 8월 유인원의 입회하에 부여 융과 신라 문무왕으로 하여금 화친을 맹세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의 회맹문은 ‘삼국사기’에 전문이 실려 있으며, 이는 당나라 장수인 유인원이 지은 것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웅진도독 부여 융으로 하여금 백제 선왕들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옛 강토를 보전하게 한다. 나제 양국은 이후 서로 화친하여 환란을 서로 구하고, 형제처럼 도우며 지낼 것을 하늘에 맹세한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취리산에서 나제 양국은 화친의 맹세를 하게 된다. 그 약속의 징표로 백마를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고 제물을 제단의 북쪽에 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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