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머물렀던 곳이라 해서 '정방뜰' 또는 '소정평'으로 불리우는 고마나루 남쪽 강변일대. ⓒ 특급뉴스 오희숙고마나루 남쪽 강변일대를 ‘정방뜰’ 또는 ‘소정평(蘇定坪)’으로 부르며, ‘소정’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이곳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웅진성을 공략하기 위해 부여에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머물렀던 곳이다.660년 백제가 망한 후에 당은 백제의 옛 땅을 나누어 5개 도독부를 설치하고,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백제의 강토를 통치했는데, 신라의 끊임없는 압박으로 676년(문무왕 16년) 본국으로 철수할 때까지 16년 동안 존속했다.‘정방뜰’은 그 옛날 매우 번창했던 곳이다.삼국사기에 ‘481년(동성왕 3년) 6월에 웅천(熊川)에 물이 넘쳐 200여 호가 표몰 되었다’는 기록은 시내가 강변에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강변에 위치했기 때문에 천여 년을 지나오는 동안 물에 씻기고 모래가 덮여 쌓여서 오직 이름만이 남아있었는데, 1946년 큰 장마로 모래를 쓸어가는 바람에 그 자리가 한 때 드러났었다.(해방 전까지도 인가가 있었다.)▲ 농토에 우뚝 서 있는 '정방뜰' 표석. ⓒ 특급뉴스 오희숙

목격자의 말로는 점토로 가로·세로 쌓은 건물 기단이 완연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에는 많은 군사가 머물 수 있는 규모의 건물이 입지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점령군은 시가지 중앙의 요충지나, 규모가 큰 관청의 건물에 자리를 잡는다.

당시 소정방은 정벌군의 총수요, 당 고종의 위엄을 등에 업고 있었으며, 부여에서 대승을 거두고 웅진에 상륙했다.

또한 현대처럼 군대가 아무 곳에 막사나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장비나 또 그것을 운반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갖추었으리라고 보기 어렵다.

아울러 백제는 인접한 고마나루를 통해 중국이나 일본과 교역을 했을 뿐 아니라, 이 나루는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은 임진왜란 이후, 한때 충청도 관내 군병들의 훈련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윤여헌 회장은 “이렇듯 많은 역사를 간직했던 정방뜰은 1천여년을 지나오는 동안 금강의 범람으로 흔적도 없이 강물이 쓸어가 버리고, 다만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이라며 아쉬워 했다.

한편 현재 이곳은 농가가 들어서고 농토로 변해버려 고장 난 농기계, 쓰레기 등이 널려 있고 오직 ‘정방뜰’ 표석만이 우뚝 서있을 뿐이다.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