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의 말로는 점토로 가로·세로 쌓은 건물 기단이 완연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에는 많은 군사가 머물 수 있는 규모의 건물이 입지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점령군은 시가지 중앙의 요충지나, 규모가 큰 관청의 건물에 자리를 잡는다.
당시 소정방은 정벌군의 총수요, 당 고종의 위엄을 등에 업고 있었으며, 부여에서 대승을 거두고 웅진에 상륙했다.
또한 현대처럼 군대가 아무 곳에 막사나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장비나 또 그것을 운반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갖추었으리라고 보기 어렵다.
아울러 백제는 인접한 고마나루를 통해 중국이나 일본과 교역을 했을 뿐 아니라, 이 나루는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은 임진왜란 이후, 한때 충청도 관내 군병들의 훈련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윤여헌 회장은 “이렇듯 많은 역사를 간직했던 정방뜰은 1천여년을 지나오는 동안 금강의 범람으로 흔적도 없이 강물이 쓸어가 버리고, 다만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이라며 아쉬워 했다.
한편 현재 이곳은 농가가 들어서고 농토로 변해버려 고장 난 농기계, 쓰레기 등이 널려 있고 오직 ‘정방뜰’ 표석만이 우뚝 서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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