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여헌 향토문화연구회장이 정안면 운궁리 문회당이 있던 자리에서 이 마을에서 40여년간 살았다는 한 노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 특급뉴스 오희숙문회당(文會堂)은 정안면 운궁리에 소재 했던 옛 서당의 이름이다. 문회당 기문은 도암(陶菴) 이재(李縡·1680~1746)가 지었고, 글씨는 그의 제자 홍계희가 1750년 충청 감사로 재임 중에 썼다.기문을 통해 운영의 실태를 살펴보면,가장 융성했던 시절은 숙종 (정묘·1687년)부터 약 60여 년간이며, 그동안 세태의 변화에 따라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문회당의 교육과정은 강학(講學)과 제술(製述)을 병행했으며, 매월 5일마다 시험을 치르고 그 과정은 매우 엄격했다. 낮이나 밤이나 책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시문(詩文) 제작에 있어서도 수천언(數千言)에 이르니 이로서 그 등급을 가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가장 출중한 사람으로 조성복(趙聖復), 최익수(崔翊秀)가 있었는데, 이들로 인해 문회당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1723년)로 말미암아 조성복이 죽음을 당하자 사기는 떨어지고 문회당도 쇠퇴했다.이후 장령(掌令) 최익수가 중흥을 꾀하였는데, 문회당의 ‘문(文)’의 뜻은 시(詩)·서(書)·예(禮)·악(樂)을 말함이며. 아무쪼록 이것을 익혀서 과거에만 연연하지 말고 인(仁)을 구하고 도학(道學)에도 힘 쓸 것을 권하고 싶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윤여헌 향토문화연구회장은 “공주가 반향(班鄕)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렇듯 주변에 명망있는 사설 교육기관이 있고, 그 곳에서 수신(修身)과 치국의 도(道)를 익히고, 나아가 과거에 급제해 양명(揚名)하고, 이런 과정에서 시예(詩禮)의 유교가 이 마을에서 저 부락으로 번져 나갔기 때문에 유향(儒鄕)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윤 회장은 이어 “하지만 요즈음 학생들이 서울에만 몰리는 교육의 편향현상을 바라보면서 이 지역에 사는 우리에게 문회당 기문은 자성의 경구로 되새겨 봄직하다”고 강조했다.한편 정안면 운궁리 마을 한가운데의 문회당 옛 자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그 당시 이용했다는 우물이 아직도 남아있다.그 마을에서 40여년간 살고 있다는 한 노인은 “우물에서는 아직도 많은 물이 샘솟아 마을 사람들이 종종 이용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문회당은 남아있지 않지만, 느티나무와 우물은 아직도 남아있어 그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 특급뉴스 오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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