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역사와 문화의 도시이다.
하지만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고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역사와 문화는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특급뉴스는 이에 따라 지역의 역사·문화를 좀 더 새롭고 진지하게 살펴볼 기회를 갖고자 윤여헌 향토문화연구회장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문화를 중심으로 답사하고,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글 싣는 순서>
①인조파천이 남긴 것들
②공주 약령시
③백제왕자 ‘융’이 머물렀던 고왕암
④옛 서당 문회당
⑤보통원
⑥수원사지
⑦비선거리
⑧취리산
또한 ‘소물(소우물)’은 인조왕 일행이 그곳을 지날 때 지친 군마가 쉬어서 물을 마신 샘으로 불리게 됐으며, 우성면 목천리에 아직 그 자취가 남아있다.
‘조왕동’이라 부르게 된 유래는 인조왕이 탄 가마가 동네 노숙의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이튿날 공산성에 임시 행재소를 설치함에 노숙이 군량미 300석을 바쳐 임금을 도왔다하여 난리가 평정된 후 동네 이름을 ‘조왕동’이라 부르도록 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편 인조왕 일행은 고마나루를 건너고 ‘하고개’를 넘어 공산성(公山城)안에 있던 충청감영을 행재소(行在所)로 삼고 2월 18일까지 5박6일 동안 머물게 된다. 인조는 산성에 머무는 동안 정시문과(庭試文科)를 시행했는데 뒷날 3학사로 유명한 홍익한은 이때 5인의 급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밖에도 공산성의 쌍수(雙樹)의 이름도 인조와 관련해서 생기고 특히 ‘수라’상에 얽힌 ‘도루메기’이야기는 회자된 지 오래이다.
윤여헌 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은 “이와 같이 공주는 인조임금의 주필지로 하여 적지 않은 유적과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며 “문화유산이라면 무덤에서 출토된 ‘금붙이’의 현란함에 곧잘 현혹되었던 눈으로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이요, 역사의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 윤여헌 회장이 우성면 목천리에 아직 그 자취가 남아있는 '소물(소우물)' 주변을 가리키고 있다. |
ⓒ 특급뉴스 오희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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