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역사와 문화의 도시이다.
하지만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고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역사와 문화는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특급뉴스는 이에 따라 지역의 역사·문화를 좀 더 새롭고 진지하게 살펴볼 기회를 갖고자 윤여헌 향토문화연구회장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문화를 중심으로 답사하고,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글 싣는 순서>
①인조파천이 남긴 것들
②공주 약령시
③백제왕자 ‘융’이 머물렀던 고왕암
④옛 서당 문회당

⑤보통원
⑥수원사지
⑦비선거리
⑧취리산


▲ 윤여헌 향토문화연구회장이 바위에 새겨진 ‘석송동천(石松洞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특급뉴스 오희숙인조파천이 남긴 것들 - ① 파천 또는 몽진(蒙塵)이라는 말이 있다.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임금이 도성(서울)을 버린다는 것은 자연인의 불행은 말 할 것도 없지만, 한 나라의 중심이 흔들린다는 그 상징적 의미는 무엇으로도 견줄 바 아니다.역사에서 보면 외침과 내란 등으로 임금이 도성을 떠난 경우는 적지 않다. 임진왜란에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했던 일, 정묘(丁卯)호란에 강화섬에 피난했던 사례들은 잘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런데 공주가 인조임금의 피난처였고 또한 그로 인해 남겨진 흔적이 하나 둘이 아닌데 이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어 보인다.공주는 인조임금 말고도,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의 난을 피해 나주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6일동안 머문 일이 있었는데 이 경우는 단순히 귀경길의 체류에 지나지 않았었다.1624년 2월 8일, 이괄이 한양으로 쳐들어온다는 기별에 인조는 ‘가마’로 명정문(明政門)을 나와 말로 갈아타고 황망히 남행길에 오른다. 양재-과천-수원-직산을 거쳐 천안에 당도한 것이 2월 12일인데, 이때에 이미 토적(討賊)했다는 소식을 듣는다.그러나 잔적(殘賊)들의 내습을 우려한 일행은 예정대로 공주를 향해 2월 13일 새벽길을 떠난다. 광정창(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 접어든 대가는 석송-오인리-목천-월미-신웅리를 지나 고마나루에 당도하게 되는데, 그때 노변(路邊)을 따라 ‘석송동천(石松洞天)’, ‘소물(牛井)’, ‘인절미’, ‘조왕동(助王洞)’ 등의 전설을 남기게 된다.▲ ‘석송동천(石松洞天)’이란 인조의 친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 특급뉴스 오희숙
정안면 석송리 큰 도로변 바위에 새겨진 ‘석송동천’은 왕을 모신 가마가 이곳을 지날 때 지방유림이 인조왕께 이 지방 백성의 어려움을 호소하니, 그 자리에서 세금을 감면토록 어명을 내렸고, 또 유림의 간청을 들어 ‘석송동천’이란 친필을 하사해 오늘날까지 바위에 새겨져 전해오고 있다.

또한 ‘소물(소우물)’은 인조왕 일행이 그곳을 지날 때 지친 군마가 쉬어서 물을 마신 샘으로 불리게 됐으며, 우성면 목천리에 아직 그 자취가 남아있다.

‘조왕동’이라 부르게 된 유래는 인조왕이 탄 가마가 동네 노숙의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이튿날 공산성에 임시 행재소를 설치함에 노숙이 군량미 300석을 바쳐 임금을 도왔다하여 난리가 평정된 후 동네 이름을 ‘조왕동’이라 부르도록 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편 인조왕 일행은 고마나루를 건너고 ‘하고개’를 넘어 공산성(公山城)안에 있던 충청감영을 행재소(行在所)로 삼고 2월 18일까지 5박6일 동안 머물게 된다. 인조는 산성에 머무는 동안 정시문과(庭試文科)를 시행했는데 뒷날 3학사로 유명한 홍익한은 이때 5인의 급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밖에도 공산성의 쌍수(雙樹)의 이름도 인조와 관련해서 생기고 특히 ‘수라’상에 얽힌 ‘도루메기’이야기는 회자된 지 오래이다.

윤여헌 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은 “이와 같이 공주는 인조임금의 주필지로 하여 적지 않은 유적과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며 “문화유산이라면 무덤에서 출토된 ‘금붙이’의 현란함에 곧잘 현혹되었던 눈으로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이요, 역사의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 윤여헌 회장이 우성면 목천리에 아직 그 자취가 남아있는 '소물(소우물)' 주변을 가리키고 있다.
ⓒ 특급뉴스 오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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