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후 강씨-자료제공 SBS
‘육룡이 나르샤’는 요즘 조선개창을 앞두고 펼쳐지는 인기 퓨전 사극으로, 이성계를 새로운 왕조의 왕으로 추대하는 킹메이커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역사는 기록, 유물, 유적 등 그 시대의 발자취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가 완벽하지 않을 때에는 역사적 상상력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방원은 왜 정몽주를 죽여야만 했을까? 우리는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만을 기억한다.

그러나 드라마 속 정몽주는 만만치 않은 계략으로 척사광이라는 여자검객을 보내 이성계를 죽이려 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땀을 쥐게 하는 극적 장면인데, 역사적 자료를 보완하는 역사적 상상력도 가미되어 재미를 주고 있다.

정치에 있어서 영원한 동지가 있는가하는 문제는 예전이나, 오늘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오늘날 정치인들도 이합집산을 밥 먹듯이 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정몽주의 반격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 이성계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여인이 한 명 있다. 바로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는 신덕왕후 강 씨이다.

강 씨는 이성계가 두 번째로 맞은 부인이고, 왕자의 난으로 가엾게 세상을 떠나는 방석, 방번의 어머니이자, 조선의 세 번째 왕이 되는 이방원의 계모로 잘 알려져 있다.

『동각잡기』 上 중에서 – 자료제공 한국고전종합DB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은 위화도 회군을 하던 당시 볼모로 잡힌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목숨을 걸고 구하는 등 조선건국의 대업을 앞두고 더할 나위 없는 가족애를 선보인다.

건국이라는 같은 목표를 둔 이들의 가족애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빛을 발했다. 드라마처럼은 아니지만, 역사상에서 실제로 정몽주는 이성계를 해하려 했던 것 같다.

위험을 감지한 강 씨 부인은 친어머니 한 씨 부인의 묘 살이를 하던 방원을 이성계에게 보내 사실을 알리기도 한다. 또한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을 때도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며 크게 꾸짖던 이성계의 분노를 무마시킨 것도 강 씨였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방원이 "어린 시절 동북면 촌뜨기가 서울구경 와서 선녀 같던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서 좋았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실제로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한 배경으로부터 선조 때까지 정치와 명신(名臣)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동각잡기』에 이와 비슷한 둘의 애틋한 기록이 나온다.

동각잡기는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이라고도 하며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조선의 건국 배경으로부터 중종 연간의 기묘사화까지, 하권은 중종 말년의 정치적 사건으로부터 선조 때의 임진왜란까지를 취급하고 있다.

현재 『대동야승』 제53·54권에 상·하 두 권이 모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그런데 『대동야승』 중에서도 야사로서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동각잡기』라고 평가받고 있기에 건국이전에는 둘의 사이가 괜찮은 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두가 길었다.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온고지신방랑객(필자의 필명임)은 나운규 선생이 영화 아리랑을 찍었다는 성북동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 신덕왕후의 한이 서려있을 정릉을 만나러 간다.

이성계가 강 씨와 처음 만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마침 그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었다. 이성계가 그 여인에게 물 좀 떠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 나서 버들잎 한 줌을 물 위에 띄워주었다. 이에 이성계는 “이 무슨 고약한 짓이냐?”며 나무랐다.

여인은 “갈증으로 급히 달려오셔서 냉수를 마시면 탈이 날 것 같아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일부러 그리했다”고 수줍게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내심 감탄한 이성계가 그때서야 여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여인의 미색이 아주 빼어났다. 여인의 뛰어난 미모와 지혜에 반한 이성계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 바로 그 우물가의 여인이 강 씨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나주의 완사천에서 장화왕후와 만나는 설화와 비슷한 내용이다. 장화왕후 오 씨와 신덕왕후 강 씨는 고려와 조선 개창자의 두 번째 부인이며, 세력 있는 권세가의 딸이라는 공통점을 가졌기에 와전된 것이거나, 여러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사한 구조의 버들잎 설화가 이성계와 결부된 것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버드나무가 고전 문학 작품에서 남녀가 만나고 이별하는 공간으로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건국시조와 관련된 이야기로 버들잎을 소재로 삼는 특별한 이유에는 버드나무가 음력 2월 봄기운에 가장 먼저 싹을 틔워 봄을 알리는 나무이며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주술력을 가진 나무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버드나무가 기우제를 지낼 때 신대(신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가지)로 사용된다고 한다. 필자는 문득 농업을 근본으로 삼는 나라가 봄, 물, 생명, 풍요를 상징하는 버드나무를 개국시조의 이야기 소재로 삼은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계는 원나라로부터 빼앗겼던 자비령 이북의 동녕부를 수복하는데 공을 세우고 근해에 쳐들어 온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백성에게 인기를 얻은 신흥무인세력이었다.

하지만 지방 토호라는 출신 때문에 한계를 느꼈고, 부인이 있음에도 개성의 권문세족 출신인 강 씨와 정략적으로 혼인한 것이었다.

고려 시대 풍습에는 향처(고향의 부인), 경처(개경의 부인)를 두었는데 강 씨는 경처인 셈이다. 이 부분은 태종 이방원이 계모란 무엇인가에 대해 신하들과 정의를 논하며 신덕왕후 사후에 그녀를 후궁으로 강등시키는 논란거리가 된다.

친모가 살아 있을 때 강 씨가 들어왔다는 사유 때문인 것이다. 계비는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그래서 후궁의 지위로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강씨는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마자 현비로 책봉됐고,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본래 태조의 원비는 한 씨 부인이어야 했으나, 태조 즉위 전인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사망했기 때문에 조선의 최초 왕비는 신덕왕후가 되고 한 씨는 뒤에 절비로서 신의왕후로 추존되게 된다.

신덕왕후 강 씨는 계비라기보다는 고향에서 따로 살았던 한씨 부인이 살아 있을 때 정식으로 들인 부인이고, 실제로 조선건국 이후 왕비로 책정된 현비이자 수비(首妃)이기에 세자책봉 문제에서도 방원보다도 방번이나 방석이 적통이라고 주장했던 것 같다.

즉 권력 지향적인 이방원에게 이복동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신덕왕후를 철저히 폄훼 해야만 하는 사연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씨 부인은 태종 8년에 태조의 묘비에 다시 수비(首妃:으뜸 왕비)로서 기록되게 된다.

자연형 석교의 대표인 정릉의 금천교
정릉은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1396)의 능으로, 29만 7,798㎡이다. 입구의 금천교는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대표적 조형물로 친근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신덕왕후의 한이 서려있을 법한 이야기와 달리 주변에 다양한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어 도심에서 한적한 풍경을 선사하는 곳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참도는 ㄱ자로 꺾여 있어 직선인 다른 왕릉과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위엄이 없어 보이는 이 형상은 천장하면서 걸 맞는 곳을 선택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정릉의 ㄱ자 홍살문과 참도

태조 이성계가 지극히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갑자기 사망하자 태조는 도성 안에 왕릉 터를 정하여 아내의 봉분 우측에 자신의 봉분인 수릉을 정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정했다.

자신의 사랑했던 부인이었고, 조선 최초의 왕비였으며, 조선 최초의 왕릉이었으므로 태조가 지대한 공을 들여 조성했다.

오늘날 서울의 정동은 정릉이 있던 곳이라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자 정릉이 도성 안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는 점을 문제 삼아 능을 현재의 정릉 자리로 옮기고, 능역 100걸음 근처까지 주택지를 허락해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집을 짓게 했다. 또한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봄·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다.

태종실록 11권, 태종 6년 4월 7일 정묘 1번째기사 1406년 명 영락(永樂) 4년
정릉의 영역을 정하다
정릉(貞陵)의 영역(塋域)을 정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정릉이 경중(京中)에 있는데도 조역(兆域)이 너무 넓으니, 청하건대, 능에서 1백 보(步) 밖에는 사람들에게 집을 짓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세력 있는 집에서 분연(紛然)하게 다투어 좋은 땅을 점령하였는데, 좌정승 하윤(河崙)이 여러 사위를 거느리고 이를 선점(先占)하였다.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2월 23일 병신 1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정릉을 도성 밖의 사을한산으로 천장하다
신덕 왕후(神德王后)강씨(康氏)를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천장(遷葬)하였다. 처음에 의정부에 명하여 정릉(貞陵)을 도성(都城) 밖으로 옮기는 가부를 의논하게 하니, 의정부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옛 제왕(帝王)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貞陵)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使臣)이 묵는 관사(館舍)에 가까우니,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각사(各司)에 명하여 반(半)을 나누어 백의(白衣)·흑각대(黑角帶)·오사모(烏紗帽) 차림으로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삼가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상고하건대, 송(宋)나라 선조(宣祖)의 안릉(安陵)을 하남(河南) 공현(鞏縣)으로 옮긴 뒤에 조석전(朝夕奠)과 삭망제(朔望祭)는 없었고, 다만 춘추(春秋) 중월(仲月) 에 제사를 행하였을 뿐이니, 이제부터 신덕 왕후의 산릉(山陵) 제례(祭禮)도 이러한 예(例)에 의하소서."임금이 말하였다. "주공(周公)이 모든 제사에 질서를 지키고 문란하게 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춘추의 두 중월(仲月)과 이름이 있는 날[有名日]에 2품관(品官)을 보내어 제사지내도록 하되, 항식(恒式)을 삼으라.“
*중월(仲月): 2월과 8월

그동안 신덕왕후의 정릉은 서울 한복판인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 근처로 추정해왔다. 그런데 신덕왕후의 능 석물로 보이는 문인석이 서울 중구 정동 소재 주한 미국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 영내에서 발견되면서 정릉의 최초 위치에 대해 논란이 생기기도 했다.

태종은 정릉의 초장지(철거지)에 있던 정자각을 헐어 태평관 누각을 짓고 봉분의 자취도 없앴다. 일반적으로 왕실 초장지는 천장 후에도 사가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봉분을 남겨두지만 태종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다만 문·무인석은 그대로 묻어두라고 명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최초의 문·무인석은 이 지역 주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4월 13일 을유 4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태평관의 북루를 새로 짓고, 관사를 개축하다
태평관(太平館) 북루(北樓)를 새로 지었다. 임금이 이귀령(李貴齡)에게 일렀다.
"참찬(參贊)은 태평관 감조 제조(太平館監造提調)이니, 정릉(貞陵)의 정자각(亭子閣)을 헐어서 누(樓) 3간을 짓고, 관(館)의 구청(舊廳)을 가지고 동헌(東軒)·서헌(西軒)을 창건하면, 목석(木石)의 공력을 덜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황엄(黃儼)이 일찍이 말하기를, ‘정자 터를 높이 쌓고, 가운데에 누각(樓閣)을 짓고, 동쪽·서쪽에 헌(軒)을 지어 놓으면 아름다울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이 누각을 짓는 것은 황엄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정릉의 돌을 운반하여 쓰고, 그 봉분(封墳)은 자취를 없애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좋겠으며, 석인(石人)은 땅을 파고 묻는 것이 좋겠다."
황희(黃喜)가 아뢰기를,"석인을 가지고 주초(柱礎)를 메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귀령에게 이르기를,"옳지 못하다. 묻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정릉의 석물로 보수한 청계천의 광통교
태종의 신덕왕후 깍아 내리기는 갈수록 더해 갔다. 1410년 8월 홍수가 나서 흙으로 만든 광통교가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로 돌다리를 만들도록 허락했다.

숭례문과 경복궁을 이어주는 광통교는 한양 최고의 번화가에 놓여 있는 다리라서 사람의 통행량이 많았으며 정월대보름 때는 남녀들이 모여 다리 밟기와 연 날리기 등의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정릉의 석물들을 계모인 신덕왕후 보 듯 하여 짓밟아 주기를 바란 태종의 심술은 아니었을까?

『태종실록 20권, 태종 10년 8월 8일 임인 1번째기사 1410년 명 영락(永樂) 8년』
광통교의 흙으로 만든 다리를 돌다리로 개축하다
큰 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광통교(廣通橋)의 흙다리[土橋]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貞陵)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石橋]를 만드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광통교의 돌기둥
원래 위치에서 150m쯤 청계천 상류로 이동되어 복원된 광통교의 다리 벽면에는 현재 왕릉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더더욱 백미로 뽑힐 병풍석의 구름무늬, 당초무늬 등이 선명하게 자태를 드러낸다.

문인의 옷 주름까지 섬세하게 묘사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병풍석의 문양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이는 이방원이 신덕왕후 강 씨에 대한 미움의 극대화 장치였을까, 아니면 우연이었을까?

이곳은 특히 불교용구로 알려진 금강령, 금강저의 완벽한 묘사가 압권이다. 왕릉에 있어야 할 석물들이 생뚱맞게 다리에 있지만, 석공의 혼이 실린 명작중의 명작으로 청계천에 가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청계천 복원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를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광통교 벽면

태조에게 충실한 내조자를 넘어 정치적 동지였던 신덕왕후를 태종 이방원이 그녀 사후에 그녀가 서럽도록 애석한 조치를 취한 건 역시 권력에 대한 알력 때문이었으리라.

문제는 강 씨가 실질적인 개국 공신인데다 여세를 몰아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해 태조의 뒤를 잇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현비의 자식을 적통으로 보는 정도전, 남은 등이 그녀의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태조도 그녀의 뜻을 따라줬다.

그러나 신덕왕후는 세자책봉까지는 과업을 이뤄냈으나, 완벽한 왕위승계를 매듭짓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 쒀서 개준다’고 그랬던가? 그토록 조선 건국을 위해 애를 썼고, 정몽주를 죽이는 무리수까지 두었던 이방원이었는데 졸지에 계모의 아들인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길 수 는 없었다.

이방원은 한 씨 소생의 동복형제들과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아들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동복형인 방간이 자신을 치려고 하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결국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곧바로 신덕왕후를 깎아내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태조와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를 함께 모시고,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해 신위를 모시지 않았던 것이고, 우리가 어진 성군으로 알고 있는 세종 또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한술 더 떠서 신덕왕후의 영정까지 불살라 버리라 명한다. “오호통제라!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던가?”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8월 21일 경진 1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
신덕왕후 및 성비가 계모인가 하는 문제를 신하들에게 묻다
편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좌우에 이르기를,"계모(繼母)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유정현(柳廷顯)이 대답하기를, "어머니가 죽은 뒤에 이를 계승하는 자를 계모라고 합니다."하였다. 임금이,"그렇다면 정릉(貞陵)이 내게 계모가 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그때에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승하하지 않았으니, 어찌 계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정릉(貞陵)이 내게 조금도 은의(恩義)가 없었다. 내가 어머니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父王)이 애중(愛重) 하시던 의리를 생각하여 기신(忌晨)의 재제(齋祭)를 어머니와 다름없이 하는 것이다."

현재 정릉의 봉분에는 난간석과 병풍석이 없으며 혼유석, 문인석, 석마, 각각 1쌍의 석양과 석호가 있다. 조선 최조의 왕비, 초대 국모의 능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한 정릉은 다른 왕비의 능에 비해 상설의 규모가 작고 초라해 과연 이것이 왕비의 능인가 싶을 정도이다.

곡장 뒤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왜들 이야기 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욕심 뒤에는 한없는 회한이 찾아 올 수도 있다는 것이 인생일 수도 있다는 것을….

곡장 넘어서 바라본 정릉

조선 왕릉의 원형이 되는 남편이자 초대 왕의 능인 건원릉과 참 대비가 된다. 훼손과 천장으로 당연히 석물도 원형이 아니다.

다만 고려 공민왕릉 양식을 충실히 따른 사각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두 개의 고석만 옛 능에서 옮겨온 것인데 장명등조차 상부의 주두가 사라졌다.

물론 처음 능을 조성했던 초장지는 고려 공민왕의 능을 차용한 건원릉처럼 병풍석과 난간석은 물론 무인석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릉에서 군락이 아니라 단릉으로 남아 있는 무덤은 달랑 3기뿐이다. 단종애사로 아련한 단종의 장릉과 정순왕후 송씨의 사릉인데 여기에 신덕왕후 강 씨의 정릉이 포함된다니 그녀가 더 애처로워 보일 뿐이다.

2009년 약수터 근처에서 소전대가 발견되어 원래의 자리인 정자각 좌측으로 옮겼다. 소전대는 조선 초기의 능인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 정릉에만 있었으며 축문을 태우던 곳인데, 정조 때 작성한 『춘관통고 』에 위치를 기록해놓아 쉽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기록의 왕국, 조선의 대단함을 또 한 번 엿 볼 수 있다.

'세원지우(洗寃之雨)'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00여 년 뒤인 선조 14년(1581) 삼사에서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현종 10년(1669) 송시열 등이 정통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 이념을 강조하면서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가 받아들여져 복권이 되고 마침내 그녀의 신주가 종묘에 봉안되었다.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던 날 정릉 일대에 유난히 많은 소낙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 비를 백성들은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고 한다.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한은 그렇게 풀렸던 것일까?”

햇살 지는 오후의 정릉 정자각

아리랑 고개에서 북악터널 쪽으로 가는 도로 좌측에 흥천사라는 절이 있다.

흥천사는 제향(祭享)때 두부를 공급하여 일명 두포사(豆泡寺)라고도 불렸다 한다.

정릉 왼쪽에 있어 도보로도 가뿐하다. 흥천사를 가면 '손잡고 오르는 집’이라고 쓴 한글 현판이 있는데 이는 얼마 전 타개한 신영복 선생의 글씨여서 그 분을 생각하는 마음에 더욱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고풍스럽게 만든 담장이 눈길을 끌게 하는데 이런 형태의 담장은 왕릉의 곡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특징은 아마도 정릉의 원찰이란 의미 때문일 것이다.

원찰이란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우는 사찰을 말한다. 이성계는 강 씨 사후 직접 정릉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조석으로 행차를 하였으며, 다시 1년간의 공사를 거쳐 흥천사(興天寺)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태조는 흥천사가 완공되자마자 그 때부터 능과 절을 둘러보는 게 일상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라 때에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그곳의 불경 소리를 들은 후에야 비로소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흥천사 만세루
흥천사는 정릉의 운명과 같이 태종때 축소되고 연산군 때 불타 폐허로 방치되다 정조에 의해 현재 자리에 새로 지어졌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명부전, 용화전, 칠성각, 독성각, 만세루, 승방, 대방, 일주문, 종각이 있다.

이성계가 아침마다 종소리를 들었던 흥천사 대종(보물 제1460호)은 동대문(흥인문)을 거쳐 광화문 종루로 옮겼다가,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으로 옮겼으며 현재는 덕수궁 자격루 옆에 있다.

사찰 내에는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 때 쓴 글씨가 남아 있고, 만세루에 흥천사라는 왼쪽 현판의 글씨가 흥선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 생활을 하기도 했던 곳이라고 한다.

흥천사는 조선 최초 왕후의 원찰이었으며, 조선 마지막 황후가 머물었던 절이라고 하니 참 공교로울 수밖에 없다. 순정효황후도 순종의 두 번째 부인이다. 역사는 때론 얄궂기까지 하다.

아무튼 정릉의 운명과 함께 했을 흥천사의 원찰 기능은 쇠락해져 현종 때 정릉이 단장되면서 실질적인 원찰 역할을 한 곳은 무학 대사가 세웠다는 삼각산 봉국사라고 한다. 필자가 미처 이 정보는 알지 못하여 봉국사의 사진은 담지 못했다. 버들잎 피는 봄에 또 찾아가보리라는 기약을 해 본다.

정릉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정릉을 알리는 버들잎 축제가 있다고 한다. 이는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로맨틱 이야기 소재 덕분인 것 같다.

10월 중순 쯤에 열린다고 하는데, 취타대를 앞세운 어가행렬이 재현된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한 번 가보아도 좋을 것 같다.

조선 개국과 이성계가 권력을 키우기 위해 선택한 한 여인은 남편을 새로운 왕조의 왕으로 만들고, 자신도 국모의 자리에 올랐으나, 전실 소생의 태종 방원으로부터 국모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강씨는 후처라기보다는 정략결혼으로 성립된 정부인인 셈이다.

또한 한씨 부인도 향처로서 이성계와 끝까지 같이 살지도 않았다. 오늘날로 치면 한씨 부인도 철저하게 버림을 받은 가련한 여인임에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이성계 개인사로서 비극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방원도 친모에 대한 그리움, 가엾음의 연민도 물론 있었으리라.

개인적인 사가의 입장으로 보면 적통은 한씨 부인의 큰 아들이었겠으나, 건국공신인 정도전이 왕가 입장에서 이성계를 보면 강씨의 후사가 적통이라는 명분의 싸움이 큰 비극을 초래한 셈이다. 과거나 현재나 권력 싸움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필연적인 역사적 순환현상이었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장남도 아니고, 더군다나 후처 소생의 차남 방석이 왕세자가 된다는 것을 정안대군인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 씨의 여섯 아들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의안대군 방석과 무안대군 방번 모두 제거되었고,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신덕왕후의 사위인 이제도 살해당하였다. 딸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 신덕왕후로서는 통곡을 하며 지하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었다.

『동각잡기』에는 강씨부인이 영명한 “이방원에게 네가 나한테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라는 기록이 나온다. 영명함을 알고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한 선택은 이렇게 참극을 가져왔다.
 
고려시대나 중국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서얼에 대한 차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부터 본격 시작되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태조 이성계가 후처에서 난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에 태종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방석과 그를 돕던 정도전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후에 명분을 만들기 위해 서얼금고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홍길동전에도 나오지만 서자나 얼자는 자기 아버지에게도 아버지라고 못하고 대감님, 영감님 등으로 불러야 했고 정실부인에게도 큰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마님 등으로 불렀으며 같은 형제, 자매지만 정실부인의 아들이나 딸에게도 도련님이라든가 아가씨라고 불러야 했다. 그러니 당사자는 얼마나 가슴이 답답했을까!”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3월 10일 기축 1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적첩(嫡妾)의 분수를 세울 것을 사헌부에서 상소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하였는데, 소(疏)는 이러하였다. 『중략』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니 적첩(嫡妾)의 분수를 어지럽힘은 불가합니다. 처·첩의 분수가 밝아질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릉 분포도
'세원지우(洗寃之雨)'의 이야기처럼 신덕왕후의 한은 풀려 도심속의 고즈넉한 공원 정릉에서 영면하기를 능침에서 눈을 감고 소망해 봤다.

왜 하필 그녀의 신주가 종묘에 다시 모셔 지던 날 그것도 초겨울로 넘어가던 그 시기에 정릉일대에만 비가 그렇게 많이 왔다는 걸까?

그러나 참 아이러니 하다. 그렇게 미워하고 도성에서 멀리 내보내고 싶었던 정릉은 천장을 했음에도 남한에 있는 조선왕릉 40기중에서 법궁인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궁궐에서 가장 가까운 릉, 정릉! 그것도 정릉의 또 다른 타이틀인 셈이다.

사연이 많은 지역을 답사한지라 호기심도 발동했고, 생각을 골똘히 해서 그런지 허기가 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답사 후에 먹는 음식은 더욱 더 별미이다.

봉화묵집 서순필 할머니
정릉아래 경북 봉화에서 고향을 떠나와 묵집을 운영하는 올 해 팔순의 서순필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밀가루 반죽을 할 때 생콩가루를 넣고 반죽을 하여 끓인 안동 국시 면발은 부드럽고 고소한 맛을 살려 주었다. 막걸리 한 잔에 곁들이는 도토리묵도 일품이었다.

객지를 떠나서도 오랫동안 고향의 맛을 지키시는 할머니의 거친 손을 잡아보았다. 맛난 것을 푸짐하게 챙겨주시는 인심이 어머니처럼 정겹다. “새 해 건강하고 하는 일 잘되라”는 덕담까지 아끼지 않으신다.

정릉에 가면 봉화묵집에 들려 맛난 국수를 오래오래 먹을 수 있도록 서순필 할머니의 강녕을 기원하며 기다림의 아리랑 고개를 넘는다.

안동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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