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범의 역사산책-2

내가 고려미술관을 처음 접한 건 광복 70주년을 앞둔 2015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방송번역 일을 하는 지인과 공산성스토리텔링 작업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공주로 가는 길에 태운 차안에서 지인은 “방송일은 게 일각을 다툰다”며 노트북을 켰다. 그녀가 켠 노트북 영상에는 알아듣지 못할 일본어가 흘러나왔다.

방송은 광복절 특집방송인 EBS 위대한 유산‘조선 백자의 꿈’이었는데, 재일교포 사업가 고(故) 정조문 선생(1918-1989)이 전 재산을 들여 이국땅에서 떠도는 우리문화재 1700여점을 수집해 세운 고려미술관과 그의 생애에 대한 내용이었다.

방송을 보고 난 내 마음은 고려미술관으로 향했다. 그 곳으로 한 번 떠나 보리라 다짐과 함께.


높고 청명한 파란 가을하늘 빛이 눈이 부신 날이다. 한적한 교토 외곽의 대로변에 택시를 세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들어선 골목은 낮이 많은 익은 한국의 골목처럼 정겹다.

몇 미터쯤 골목을 거슬러 올라갔을까? 한 쌍의 익살스러운 무인석이 배시시 웃으며 우리를 맞는 듯하다.

역시 우리 것에 대한 익숙함은 편안함 그 자체이다. 운이 좋게도 문화유산대학원 동문으로 고려미술관을 직접 다룬 다큐멘터리 EBS 위대한 유산 ‘조선 백자의 꿈’을 번역한 김조연 선생과 역사․문화여행 ‘꿈 담기’의 탁금란 대표와 동행했다.

‘일본 속의 한국문화 탐방길’에서는 고려 미술관에 들려 정조문 선생의 아들이자, 현재 미술관 대표를 맡고 있는 정희두 선생을 직접 만나 전시된 유물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일본 전역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우리 문화재들과의 눈인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타국에서, 동포가, 해외에 있는 한국문화재만을 전시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미술관에서.

설렘을 뒤로하고 미술관에 들어서 펼친 팸플릿에는 이런 문구가 써있었다.

‘조선이나 한국의 풍토 속에서 성숙한 아름다움은 여기 일본에서도 언어, 사상, 이념을 넘어 이야기합니다. 부디 조용한 마음으로 그 흥취를 느껴주시기 바랍니다.’

고려미술관을 설립하며 고 정조문 선생이 쓴 이 개관사는 유물들을 관람하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여운을 남겼다.

1988년 10월 25일, 조국에서는 올림픽 4위를 달성해 후끈 달아오른 여운이 가시지 않았을 무렵 백자 항아리 하나에 조국을 가슴에 담기 시작한 한 인물은 30년 만에 일본의 교토 외곽에서 조용히 또 다른 한국을 채우고 있었다. 뭉클했다.

얼마 전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방영되었던‘응답하라 1988’라는 드라마가 떠올랐다. 그의 손때가 묻었을 유물들은“고 정조문 선생이 떠도는 나를 이렇게 정착시켜 준 것”이라며 환한 미소로 나를 대했다. 그리고 그의 남다른 조국애에 대한 보답으로 아름답게 치장, 응답하는 듯하다.

팸플릿에 실린 개관사 문구

천년고도 교토의 외곽에 자리 잡은 고려미술관은 일본인들이‘일본 속의 한국’이라 부른다.

이곳을 세운 고 정조문 선생은 당시 여섯 살이던 일제 강점기,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왔다. 초등학교 3년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가난과 ‘조센징’이라는 이지메를 당하며 학교조차 다니기 어려운 역경 속에서 힘없는 서러움과 좌절을 맞보며 성장해야 했다.

그는 고생 끝에 파친코 사업가로 성공했지만, 무언가 가슴 한 구석에 서러움이 남아 있었다.

고 정조문 선생이 처음 수집했던 조선백자 달 항아리

그러던 중 교토의 기온거리 한 골동품상에서 조선백자 항아리를 만났는데, 이 항아리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됐다.

조선인들을 무시하는 일본인들도 조선의 도자기에는 맥을 못 추고 열광하며 동경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은 채 백자를 처음 만난 그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그 느낌은 곧 조국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자라왔던 그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바뀌는 원천이 됐다.

“결국 일본인들이 열광하는 것을 만든 것은 우리 민족이고, 그 작품에는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것 아니겠는가?”

그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50만엔을 주고 망설임 없이 그 도자기를 구매했다. 이후로 그는 일본 속에 산재한 우리 문화재 찾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다.

일본에 있는 우수한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과정은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빚을 내서라도 과감히 행동으로 옮겼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간송’이라고 불리게 됐던 것이다.

그의 이런 일본 내 우리문화재 수집 열정에 대해 우에다 마사야끼 교토대 명예교수는“손에 넣을 돈도 없으면서 보지 않고는 못 배기고, 보면 만지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하고, 그것이 괜찮은 물건이다 싶을 때는 병에 걸리고 마는 정도”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수집품이 1,700여점. 그는 1969년 '조선문화사'라는 기관을 설립, 계간지‘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발행했다.

그리고 1972년 재일 사학자들과 제휴해 일본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한반도와 관련한 유적을 탐방하는 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이는 재일교포 및 한국인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알리는 계기도 됐지만. 일본 문화의 원류가 조선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일본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 정조문 선생은 자신의 재산을 쏟아 부어 이렇게 30여 년간 조선의 도자기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그림, 민속품, 불상과 같은 문화재들도 다양하게 수집했다.

그가 수집한 문화재 중 100여점은 명품으로, 한국에 와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정도로 귀중한 문화재에 해당한다고 한다.

고 정조문 선생은 1988년 그는 자기 집을 개조해 교토의 한 외곽 지역에 미술관을 설립, 그 이름을 '고려미술관'이라 정하고,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모두 전시하고 있다.

이 문화재들은 모두 일본 현지에서 수집한 문화재이며, 미술관을 설립한 사람이 우리 동포라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다. 아울러 우리 문화재만을 전시한 유일한 해외 소재 미술관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고 정조문 선생의 아들 정희두 대표는 미술관 설립 1년 후 애석하게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아버지의 한마디“통일된 조국에 미술관을 기증하라”는 유언을 가슴에 새긴 채 25년째 고려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관람객이 줄어들고, 물려받은 파친코 사업마저 불황을 맞으면서 심각한 운영난을 겪고 있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며 겪어야 했던 고난을 한국미술품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켰으면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고 정조문 선생은 6살 때 고향을 떠나 일본에 정착한 이후로 죽는 그 순간까지 고국의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정희두 선생은 “선친께서는 언제나 통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있었고, 그래서 미술관 이름도 통일됐던 시절의 이름인‘고려’라고 지으셨다”고 밝혔다.

정조문 선생은 1988년 일본 NHK와의 인터뷰에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남한도, 북한도 내 조국이고,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서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래서 나는 슬픔을 견디면서 재일조선인으로 살면서 이곳 교토에서 눈을 감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눈을 감을 곳은 고려미술관이라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정조문 선생이 그렸던 통일된 조국에 그가 수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 돌아오는 일은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에서 기획전시할 계획은 없느냐?”는 우리의 질문에 대해 정희두 선생은“교토에서 일본인들에게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일도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한국에는 간송이나, 리움같은 훌륭한 미술관이 있어 자랑스런 우리문화를 만날 수 있지만, 일본인이 한국에 나가서 한국의 유물을 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일본열도의 문화원류인 우리문화를 재일교포 및 일본인에게 알리고, 일본에서 한국을 가르치고자하는 역사교사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사명감과 역할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희두 선생

 30여 년간 우리나라 문화재 환수에 남다른 노력을 펼치며 ‘일본의 간송’으로 평가받는 재일교포 1세대 문화재수집가 고(故) 정조문(1918~1989) 선생.

남의 땅 일본에 살고 있는 냉대 받는 조선인으로서 집념과 의지만으로 조국의 얼을 지켜내고자 했던 그의 업적은 위대했다.

자기가 사는 공간을 전시실로 내놓아야가면서 까지 타국에 있는 우리나라 문화재를 지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 바친 그는 아직 한국 사람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해외로 반출된 유물은 대략 16만여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중 많은 수의 유물은 일본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얼마만큼 되는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최근 들어서 정부와 또는 민간 합작으로 해외의 우리 문화재환수운동을 활발히 꾸준히 펼친 결과 어보와 같은 문화재가 환수되기도 했다.

“통일된 조국에 기증 하겠다”던 유지는 언제 완성될지 모르고,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국가 간의 문제가 있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고려미술관은 만성적인 재정부족으로 특별전과 교육프로그램 등의 기존활동을 접어야할 상황에 처해 있다.

교토에서 만난 고려 미술관은 아주 아담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초라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미술관에 얽혀 있는 사연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초라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조국을 그리워하고, 우리 것을 소중히 생각하는 현해탄 건너편의 후손의 따뜻한 가슴이전해지기 때문이다.

고려미술관이 한국을 잘 모르는 일본인과 교포들에게 우리문화유산의 자긍심을 알리는 소중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응원하고자 한다.

고려미술관에는 다소 투박한 듯 그러나 친근해 보이는 철화백자가 하나 있다. 정조문 선생이 살아생전에 더 애정을 담은 도자기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팸플릿의 표지로도 사용됐다.

다소 거친 듯 한 표면은 조국 없이 산전수전 겪었던 그의 인생을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물결치면 저 돛단배라도 타고 고향으로 가고 싶은 염원이 담겨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그는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고, 자신의 조상이 조국의 흙으로 빚은 도자기를 보면서 향수를 달랬을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정희두 선생에게 물었다.“모두가 소중한 유물이지만, 특히 애착이 가는 유물이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그는 “선친인 정조문 선생이 처음 만났던 유물인 백자 달 항아리”라고 답했다.

“항아리는 일본에도 있고, 한국에도 많이 있지만, 우리 항아리가 그 어떤 항아리보다 더 곱고, 더 귀엽습니다”라며 큰 웃음을 짓는 그. 그의 그러한 웃음 속에는 미술관을 설립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나왔다.

고려미술관을 나오는 길에 정원에서 만난 석탑 한 기. 이 석탑은 고베의 어느 밭에서 나뒹구는 것을 10년간을 설득해 어렵사리 데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석탑은 부재가 일일이 다 맞아 떨어지지는 것 같지 않다. 기단과 옥개석 사이에서 상승감이 없어 보여야 할 이 석탑.

그러나 내 눈에는 마치 하늘과 맞닿아 보일 정도의 착시를 느끼게 한다. 지나가는 바람은 살랑거리며“나는 교토의 한국”이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나에게 말한다.“우리 다시 만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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