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산 자락 화암사(佛明山 花巖寺)를 아시나요?”

옛날 옛날에 임금님 딸 연화공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불심이 깊은 임금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꽃잎 하나를 던져주고 사라졌지요.

꿈에서 깨어난 임금은 부처님이 일러준 꽃을 찾아 수소문을 하였고, 깊은 산 속 바위 위에 연못의 용이 올라와서 연꽃을 키우고 있더랍니다.

용감한 신하가 그 연꽃을 따와서 공주의 병은 낫게 되고 부처님의 은덕이라 생각한 임금님은 그 바위에 절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절 이름을 ‘화암사’라고 불렀답니다. 눈이 살포시 내린 겨울 날, 커피 색깔 낙엽 융단 위에 있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 봅니다.

그 흔한 사찰입구 식당이나 기념품 가게 하나 없고, 여느 절처럼 잘 닦여진 길도 아닌 구비구비 골짜기를 올라가니 사각사각 눈 밟히는 소리가 들립니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셨지만,‘우화루’라는 바라지창이 달린 건물 밑은 마치 성벽을 쌓은 듯 눈길은 미끄러워 전설 속의 용이 지키던 연꽃처럼 내게 쉽게 길을 내주지 않습니다.

왼쪽의 적묵당과 오른쪽 우화루 사잇길
그런 영험한 설화가 있어서 일까요? 일주문, 천왕문이 겹겹이 없어도 이미 속세를 떠나 온 듯 조용합니다.

어렵사리 올라선 절집에 들어서자 인적은 없고‘조용히 다녀가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띕니다.

화려하게 단청을 입히지 않은 절집은 안도현 시인이‘화암사 내사랑’이라는 시에서 잘 늙은 절집.

곱게 늙은 절집이라고 표현했는데 내 눈으로 직접 본 순간 고요하니 그 표현이 더욱 더 감정이입이 됩니다.

사람도 이 단아한 늙은 절집처럼 곱게 늙어가서 훗날에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극락전 옆 뒤편으로 철영재가 보이고 불명당이 극락전과 더불어 마당을 사이좋게 바라본다.
아담한 절집 작은 마당을 두고 극락전과 우화루가 남북으로 마주봅니다.

선방인 적묵당과 스님들의 처소인 불명당이 동서로 마주 보아 네 건물이 서로 처마 끝이 닿을 듯 말 듯 옹기종기 사이좋아 보입니다.

극락전의 용마루가 우화루보다 약간 높긴 하지만 적묵당이나 불명당과 격의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늑하면서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절이 아니라 절집이라 불리는 이유일까요? 본래 부처님의 뜻은 과시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화암사가 위치한 불명산(佛明山)자락의 불명(佛明)이란 뜻과 아주 잘 어울리는 절 모양 같단 생각이 불현 듯 들었습니다.

극락전 <국보 316호>
극락전에 들어서니 아미타불을 안치한 닫집은 화려하고 신비스럽기만 합니다.

꿈틀거리는 용 한 마리가 부처의 머리 위를 호위하고 비천상은 주위를 날아다닙니다.

화려한 연꽃 장식은 화암사 창건에 얽힌 상상속으로 빠져들게 만듭니다.

“저 용이 바위에 연꽃을 키웠다는 전설의 용이었을까?”서방정토에 머무는 분 답게 홀연히 화엄법계로 인도하는 선재동자가 나타나 법당에 황홀한 향기 퍼트리고 험한 세상 속 다리가 되어주는 부처의 세계를 찾으라고 속삭이는 듯합니다.

극락전은 하앙식 구조라는 건축양식을 하고 있는데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를 더 설치해 지렛대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더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건축 양식입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건물이 알려 지기 전까지는 유물 등을 통해서만 존재 가능성을 추정해 왔을 뿐이지 남아 있지 않은 양식이었습니다.

그 희소성은 보존 가치가 더욱 더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육중한 처마를 받치는 백제식의 하앙식 공포를 계승한 점이 2011년에 화암사 극락전을 국보 316호로 승격시킨 주된 이유였던 것입니다.

극락전을 자세하게 보면 앞 쪽은 용의 얼굴 모양으로 화려하게 조각했지만, 전각 뒤의 공포는 단순하게 처리한 형태를 띱니다.

또한 극락전 편액은 세 글자를 한 판재 속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한 판재에 한 자씩 새겨 세 개로 나눠 따로 걸어놔서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현재 극락전은 1981년 수리하면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1605년(선조 38)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극락전 건물이 하앙식 구조인 점이 편액을 한 글자씩 따로 만든 이유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편액 위를 보면, 끝부분을 여의주를 쥔 용의 발모양과 용의 머리를 조각한 하앙 부재 사이를 널판으로 마무리한 뒤 그 위에 그려놓은 불화가 있습니다.

고상해 보이는 주악상이 펼쳐진 이 불화를 살리기 위해 편액을 한 자씩 만들어 달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와 함께 건물이 하앙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도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하앙부재를 쓰다 보니 통판 부재를 쓰기 위한 공간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인 거지요. 건물하나 짓는 데에도 조상들의 섬세함이 묻어납니다.

극락전 우측에는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충신의 상징인 성삼문의 할아버지, 성달생(1376~1445)이 전라 관찰사를 거치며 화암사를 중창 불사한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인 철영재(啜英齋)가 있습니다.

유교를 골자를 한 조선에서도 풍수 좋은 자리를 물색하다가 찾은 곳이 바로 화암사였다네요. 철영재란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꽃을 마신다’라는 뜻이지만, 사찰 안내판에는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것으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결국에는 향기 있는 꽃봉오리를 마시는 아름다운 행위는 말조심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선현들의 생각이었던 걸까요?

현판에는 어떤 연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조선 후기 서화 3절로 유명한 자하 신위 선생(紫霞 申緯)의 휘호가 들어가 있습니다.

우화루
바라지창이 정겨운 우화루는 보물 662호입니다. 고풍스러운 이 우화루 안에 달린 목어는 충남 공주의 마곡사와 전남 순천의 선암사 목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어로 꼽힌답니다.

비가 꽃처럼 내리는 누각의 뜻을 가진 것처럼 바라지창 활짝 열고 꽃들을 볼 수 있는 봄날에 우화루를 다시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옛 건물들은 안에서 밖을 봐야 제 맛이고 사계절 다 다른 매력을 뽐낸다지요? 해우소 뒤 언덕으로 오르면 화암사 중창사적비가 서 있습니다.

중창비에서 화암사의 내력을 알 수 있는데요. 화암사는 아마도 삼국시대 말엽부터 절터가 있었던 듯 합니다. 원효와 의상이 기도했다는 원효대와 의상암이 있었다는 중창비의 한 구절이 전해지는데요. 이 절은 고려 때 첫 중창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네요.

극락전
몇 백 년을 거치는 동안 전란에 소실되는 비운을 겪은 뒤, 1611년에 와서야 우화루와 극락전의 중건을 이루었고. 그 뒤로 몇 번의 복원과 중수를 거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건축물은 복원 중수하면서 전 시대의 양식을 전통적으로 고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백제 고토지역에서 신라통일 후에도 백제계 석탑이 나타나는 사례를 봐도 알 수 있지요.

아마도 화암사 이전에 이 곳은 백제의 절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백제식의 하앙식 공포가 이 곳에 유일하게 남아 있게 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는 않을까요? 

한 겨울에 불명산 초입 주차장을 지나 계곡을 끼고 숲길을 오르다보면 철계단 위로 얼어 붙은 폭포가 장관을 연출합니다.

이러한 풍광을 발아래에 두고 오르다 보면 자연 암반위로 쌓은 돌담과 우화루가 보이고 화암사 전각 지붕 뒤로 불명산 자락이 병풍처럼 서 있습니다.

철계단 위를 오르다 보면 안도현 시인의 ‘화엄사, 내사랑’ 푯말이 있다.
140여개의 철계단이 나올 때 쯤 시인은 말합니다. “인간 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다고,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 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다고, 그리고 잘 늙은 절집 한 채!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는 이 늙은 절 집을 가만히 놔두지를 않고 반대쪽으로 임도를 내어버리는 잔인함을 저질러 버렸습니다.

찾아가는 길을 애서 알려주지는 않겠다는 시인의 갈망을 짖 밟아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깊은 산 속 바위 위에 연못이 있고 용이 올라와서는 연꽃을 키웠다는 화암사 창건 설화처럼 천년을 나이 먹어도 고즈넉히 아름답게 늙어 갈 절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이 방랑객의 한 낫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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