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홍기 전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

전홍기
고인이 유신정권에 맞서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을 할 때, 당시 언론에서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칠흙같은 암흑기에 김덕룡 비서(전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뜻있는 인사들이 유인물을 복사해 진상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 필자도 민주산악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전단지를 복사해 돌렸다.

공안에 발각되어 유치장 신세를 진 것을 기억하는데, 서슬퍼런 독재시절이었으니 겁도 났지만, 결단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이 사건이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되어 비서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82년부터 89년까지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당시 함께했던 비서진은 김덕룡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이원종 전 정무수석, 김무성 현 새누리당 대표,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 등 우리나라 정치사에 중요인물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1985년 신한민주당을 창당할 당시 ‘전 신민당 이아무개 국회의원 등 2명 현역의원을 참여시키면 안된다’는 여론이 대다수였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들을 받아들였다.

김 전 대통령은 그 이유를 묻는 필자에게 “바다에 대해서 생각해봤느냐. 바다는 어떠한 강물이 들어와도 다 받아들인다”면서 “정치란 바다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신한민주당은 그들을 포함해 50여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그들의 충성은 두말할이유도 없었다. 한참 지난 뒤 회고하니 “큰 정치인은 다르구나”라는 확신이 섰다.

6‧10 항쟁 직후 전두환을 만나선 안된다는 전화가 상도동에 빗발치는 가운데도 김 총재는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끝까지 주민들의 의견은 경청했으되, 신군부와 당당히 맞섰다. 전혀 흔들림 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용기와 의연함이 있었다.

고인은 경청과 소통의 정치인이었다. 87년대선당시 조찬기도회석상에서 아무개 목사님이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에 찬송가가 울려퍼질 것이고,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지내는 모습은 사라질 것’이라고 발언, 사태가 일파만파 번졌다.

충실한 기독교신자인 김영삼 후보는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를 보였으나, 비서들의 충언에 바로 수긍하고 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었는데 묵직한, 선굵은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재임당시 역사를 바 로세워야겠다는 의지는 확고부동 했다. ‘성공한 쿠테타라 할지라도 역사는 바로잡아야한다’면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의 심판대에 세운 것이 그것이다. 김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감히 누구도 상상 못할 일이었다고 자부한다.

故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 혈서로 충성 맹세한 친일행적을 소멸시키려하는 현 정권의 교과서 국정화 움직임과는 사뭇 대조적인 행보이다.

청와대 안가를 없앤 것도 잊지 못할 일이다. 청와대 안가는 군사독재시절 재벌들의 정경유착 온상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곳이 바로 권력형 비리의 온상지”라면서 안가를 없앤 것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금융실명제를 통한 부정한 돈이 오고가는 것을 근절시킨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지난 22일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접하고 추모기간 내내 서울대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함께 비서직을 수행했던 사람 대부분이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의 한결같은 바램은 김 대통령이 이룩해 낸 민주화가 흔들리는 현 상황에 대해, 충고와 가르침을 주셔야하는데 안타깝다는 반응이었다.

유난히도 추웠던 영결식 날, 고인의 마지막이 아쉬운 듯 하늘에선 함박눈이 하루종일 하염없이 흩날렸다.

“대통령님, 평생 민주화를 위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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