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60살 정도부터 사막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드문드문 사막을 소재로 한 시를 쓰고 사막에 관한 책을 구해 읽었다.

사실 실크로드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길이요 사막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그것은 문명의 길이며, 인간의 길이며, 낙타와 함께 하는 장사의 길이며, 삶과 죽음의 길이다.

 

만화나 동화를 통해 만난 『서유기』가 실크로드였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신라의 스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벌써 실크로드였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사막에의 동경은 보다 일찍부터였다고 볼 수 있겠다. 사막은 오래 동안 막연한 상징의 대상이었으며 그리움과 꿈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냥 보고 싶었다. 넓은 모래밭을 보고 싶었고 신기루라는 걸 보고 싶었고 오아시스도 확인하고 싶었다.

앞에서 적은 대로 이미 미국의 서부 쪽 사막을 여러 차례 보았지만, 내가 그리워 한 사막은 어디까지나 아시아의 그것이라고 생각해 중국의 사막을 보고 싶었던 것이 이번 여행의 주된 목적이었다. 게다가 불교 미술의 정수인 돈황 막고굴을 보고 싶었다.

서안을 지나 란주부터가 이미 사막이었다. 황하가 도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도시, 란주. 가까이 황하를 두고서도 란주의 나무들은 모두가 사람의 손으로 날라다 주는 물을 마시며 연명하고 있었다.

란주에서부터 무위, 장액을 거쳐 돈황에 이르는 길 자체가 사막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갈수록 산의 나무가 사라졌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바위산만 남다가 모래산이 되었다가 옛날 서역과의 세관 역할을 했다는 양관(陽關)에서는 아예 모래 산조차 사라지고 모래지평선만 남았다. 그것이 실크로드였고, 사막이었고, 서역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바람이었고 햇빛이었고 머나먼 땅 끝, 고도(高度) 제로 그것이었다. 사람들이 낙타풀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막의 풀들만 낯은포복으로 드문드문 자라고 있을 뿐. 그것은 황무지를 넘어선 죽음의 땅.

아, 이것을 보자고 우리가 그 먼 길을 달려왔더란 말인가! 허무한 마음을 무한 쏟아지는 햇빛이 채워주고 세찬 모래 바람이 대신해서 가려주고 있었다.

점점 산이 작아지고 갈라져 바위가 되고 바위가 부서져 자갈이 되고 자갈이 부서져 모래가 되는 것이 사막이었다. 양관쯤의 바위는 붉은 색 바위였던가. 모래조차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나는 까칠까칠한 모래를 한줌 쥐었다가 내려놓고 그 부근에 있는 붉은 색 자갈돌 몇 개를 주워 호주머니에 챙겼다. 나름 옛날 중국의 끝 실크로드에 왔다간 기념품인 셈이었다.

장액이란 데서 돈황으로 들어가는 날은 하루 8시간 자동차를 달려야만 했다. 지루하고 따분한 길. 왼쪽으로 천산산맥이 줄창 따라붙고 있었다.

나중에는 산맥의 머리에 있는 만년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길이 지나는 곳이 바로 고비사막이라고 했다.

운전기사가 졸지 않게 하기 위해 가이드는 앞자리에 앉아 계속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가이드가 말을 시키지 않을 때 운전기사는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졸음을 쫒기 위한 방책인 모양이었다.

간간 멀리 보이는 들판에 모래바람이 일었다. 그 모래바람은 햇빛과 어울려 뿌옇게 시야를 가리기도 했다. 그렇게 모래바람과 햇빛이 뒤섞여 신기루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배고프고 고달픈 대상(隊商)들에게는 바다로 보이고, 푸른 숲으로 보이고, 때로는 음식으로도 보인다고 가이드가 설명해줬다.

신기루! 우리들 젊은 시절 배고프고 고달프던 많은 날들. 우리들 또한 인생의 신기루를 많이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나이 들어 이제 늙은 사람이 되고 보니 그 모든 것들이 헛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늙은 사람이 된 것은 얼마나 잘된 일이고 고마운 일인가. 창밖의 지루한 풍경에 거의 모든 동행들이 눈을 감고 졸고 있는 그 시간. 나는 한 순간도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오랴 싶은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핵심은 막고굴을 보았다는 데에 있다. 막고굴을 보기 전 막고굴에 대한 문화영화 두 편을 보았다.

한편은 막고굴의 역사에 대한 것이고 한편은 막고굴 내부의 벽화에 대한 것이었다. 두 편 모두 막고굴에 대한 사전 지식과 이해를 갖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우리는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막고굴은 영화관에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어제 오후에 본 명사산의 일부분이라고 했다. 제법 큰 개울의 다리를 건너 높다랗게 자란 백양나무 수풀 속에 막고굴은 은신하고 있었다.

백양나무 수풀을 보면서부터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아, 막고굴. 정말 내가 이곳에 왔구나. 내 성한 다리로 이 땅을 밟고 내 성한 두 눈으로 이 풍경을 확인하고 내 가슴으로 모래 바람을 숨 쉬고 있음에 무한 감사를 느껴야 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다시 살아서 이런 풍경을 보게 되다니요.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고대 불교미술의 흔적 앞에서 나는 또다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사람이 되었다.

쏴아쏴아 메마른 바닷물결 소리를 내고 있는 백양나무들은 키가 커서 고개를 제키고서도 그 끝이 때로 보이지 않았다.

그 녀석들 역시 사람이 날라다 주는 물을 마시며 오랜 세월 그렇게 목숨을 버티고 있다고 했다. 간간이 바람 속에 먼지 같은 모래가 뿌옇게 날리고 있었다.

가이드의 주선으로 우리는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연구원 한 사람을 만났다. 이름은 영가화. 가냘픈 몸매에 단정한 옷차림,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와 말씨를 지닌 어여쁜 중국 아가씨였다.

막고굴의 개수는 모두 735개. 가운데 벽화나 불상이 있는 굴은 또 492개. 그 가운데 관광객에게 공개되는 굴은 제한적이고 또 평소는 닫혀 있어서 영가화 씨가 일일이 그 문을 열쇠로 열고 우리를 안으로 들여 설명해주었다.

열성적이고 학구적인 설명에 우리도 덩달아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되었다. 일행 중 가장 연장인 내가 가장 많이 관심을 가진 사람이고, 가장 많이 질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막곡굴을 돌아보면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비천상이다. 우리나라 신라 성덕대왕 신종인 에밀레종의 몸통에서도 보았고, 만주의 집안(集安) 소재 고구려 벽화 속에서도 만났던 하늘을 나는 여인, 바로 그 여인의 그림이다. 막고굴의 비천상은 하나가 아니었다.

벽화가 있는 거의 모든 굴마다 그려져 있었고 그 모습 또한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비천상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신비하고, 조그마했다.

흐린 눈을 치뜨고 비천상을 찾아내는 시간 내내 나는 몸이 허공에 붕 떠 있는 듯 황홀했고, 가슴에는 열락의 샘물로 가득했다.

내가 살아서 성한 내 나리로 걸어서 내 눈으로 저 모습들을 본다니 이거야말로 온전히 살아있는 자의 축복과 행운이 아닌가.

고맙게도 명가화 씨는 제 17호 석굴인 장경동도 보여주었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펠리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5만권의 문서가 쏟아져 나온 석굴이다.

우리나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것도 바로 이 석굴에서다. 그런데 그 책마저 발견자에 의해 프랑스로 옮겨졌다니 문화적 약탈과 도둑질이 따로 없겠다.

현장에서 장경동을 보면서 이런 옛날이야기를 전해 듣는 마음이 여간이나 편치 않았다. 그나저나 조그만 창문으로 들여다보이는 장경동 안에는 당나라 말기의 스님이라는 홍변 스님의 상이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뒤로는 당나라 시절 아름다운 생활벽화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당나라 시절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것과 당나라 시절 그림을 확인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탄스러운 일이었던가. 새삼 우리를 안내해주고 좋은 설명을 정성껏 해준 영가화 씨, 그 예쁜 중국 처녀에게 감사하는 심정이다.

여러 개의 석굴을 둘러보느라 일행 모두 다리가 아프고 지쳐 있었다. 석굴을 나오니 다시금 몸집이 크고 새하얀 백양나무 높은 가지에 모래바람이 불고 수없이 많은 나뭇잎들은 마른 바다 물결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런 때의 느낌을 가슴이 먹먹하다고 표현해야 하나. 우리는 영가화 씨를 따라 학술연구소의 기념품 판매장에 가서 책도 사고, 그림도 사고, 엽서도 사고, 또 사막에서 나오는 돌로 만들었다는 팔찌를 사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여행의 내리막길, 귀로의 차례다. 돈황에서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돈황역에서 지금껏 우리를 데리고 다닌 버스기사와 헤어진 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야간열차에 올랐다.

이름은 '돈황호'. 그것은 밤을 새워서 가는 침대열차. 4인 1실로 네 개의 침대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새하얀 시트에 싸인 매우 깔끔한 침대차였다.

아내와 나의 방은 17호 열차 4번과 5번. 동행한 청양 누이동생 내외의 침대가 6번과 7번이어서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어 있어 모처럼 가족이 한방을 쓰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한 가족이 한 공간을 사용한다는 것, 그것도 만만치 않은 행운이다. 출발지에서 종착지까지 밤을 새워 달리는 기차.

기차는 달리면서 두 차례 정도 멈추는 것 같았고 일행들은 하루해가 저무는 광경과 하루해가 다시금 밝아오는 광경을 기차 안에서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와 많은 느낌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런 때는 혈연의 가족이 아니라도 가족이 되는 마음이 된다.

다음날 난주에서의 일정과 다음날 비행기 타고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하나의 사족이나 보너스에 지나지 않는다. 귀로에 오르고 보면 벌써 마음은 한국에 돌아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돌아와 가슴이 뻑뻑해서 힘이 들었다. 이미 사라진 풍경들이 어른거리고,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드리는 것 같아서 고통스러웠다.

그 풍경과 소리들을 지워내지 않고서는 다시금 나의 생활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그 방법이 바로 메모를 정리하는 것이고, 사진을 정리하는 것이고, 또 여행기를 적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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