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공주대 조동길 교수

이곳 공주에 살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또 그들은 어떤 것을 즐겼고 사는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런 것을 알려 주는 옛 자료는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 기록에 의하면, 공주 사람들은 “남자는 쟁(箏:열두줄로 된 현악기)과 적(笛:일곱 구멍이 있는 관악기)을 좋아하고 여자는 노래 부르기와 춤추기를 좋아한다.”(男好箏笛女好歌舞:『公山誌』風俗條)라고 하여 그 편린 정도를 알게 해 주고 있으나, 이는 외국 기록을 그대로 전재한 것으로서 당시의 보편적인 한국인 전체를 평한 것일 가능성이 많으며, 공주 사람만을 액면 그대로 나타낸 말로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또한 공주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나, “차령 이남의 사람들은 배역(背逆)의 형세가 있으니 기용하지 말라”는 고려 태조의 유훈(遺訓) 이후 형성된 공주 사람에 대한 평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당시의 정치적 사정과 목적에서 나온 것인 만큼 공주 사람의 기질이나 인물됨을 나타내는 말로는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공주는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살던 사람의 기질이나 그 사람됨을 정확히, 그리고 명백하게 서술한 자료는 없는 편이다.

이러한 사정은 사실 어느 지역이고 마찬가지이다. 같은 지역에서 살아간 사람들이라 해서 모두가 한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지역을 강조하여 “나는 어디 사람이다”라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만 사는 게 아니다.

특히 여성은 결혼과 함께 고향을 떠나는 경우가 많으며, 남자도 직장이나 또 다른 이유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공주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다가 죽어 공주 땅에 묻힌 사람은 두말할 필요 없이 알짜배기 공주 사람이다.

하지만 공주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이곳에 와 살다가 죽어 묻힌 사람, 이곳에서 태어나 다른 곳에서 살다가 시신만 공주 땅에 묻힌 사람, 출생지는 이곳이 아니나 인생의 상당 부분을 공주에서 살다가 떠난 사람, 잠시 거쳐 갔지만 공주 땅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사람도 공주 사람으로서 적잖은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출생지라는 면과 함께 공주와 연관된 삶들도 모두 공주의 삶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공주에는 참으로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집권 실세 정치 집단의 구성원들, 중앙에서 파견된 고위 관리들, 스승을 찾아 공부하기 위해 왔던 선비들, 유배되어 왔던 정치인들 등 지배층 및 정치 관계의 인물들이 있고, 체제와 정치권력에 반역했던 인물도 있으며, 충성심과 애국심으로 일관했던 충절의 인물도 많이 있고, 문화와 예술계에 불멸의 업적을 남긴 인물도 적잖다. 그런가 하면 효행으로 이름 높은 인물도 있고, 엄청난 재물을 모은 부자도 있었으며, 종교적 신념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분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사대부, 양반, 중인, 아전 무리, 의원, 역관, 장사꾼, 공장이, 농사꾼, 노비, 백정, 광대…….

게다가 이름 없이 살던 무수한 백성들, 또 백제 함락 이후 와 있었던 당나라 사람을 비롯하여 일본인, 선교사를 위시로 한 서양인들 등 이 땅을 거쳐 갔거나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계층이나 수에 있어서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했다고 할 수 있다.

1) 혼이 살아있는 공주 인물들

제사 받는 충신들

계룡산은 민중들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평소에는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난리 때는 안전한 피난처로, 그리고 어지러운 세월 동안에는 메시아의 강림 예정지로서, 힘없고 약한 백성들의 의지와 기도처로써 수천 년을 이어져 왔다.

이 산의 동쪽 기슭에 동학사라는 절이 있다. 그런데 유서 깊은 사찰임에도 이 절 입구에는 홍살문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 그런가. 바로 이 절에 있는 동계사, 삼은각, 숙모전이 그 비밀의 열쇠다. 신라 충신 박제상, 고려 말 부당한 왕조 변혁에 반대했던 삼은(정몽주, 길재, 이 색),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반대했던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이 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과 충신들을 각각 추모하고 제사지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국가의 대표적 충신을 제사하고 그 뜻을 기리는 곳이기에 홍살문이 서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들 인물들은 너무 유명하기에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조선조의 이인(異人) 선비

동학사에서 나와 공주 쪽으로 오다 보면 공암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충현서원이라고 하는 충청도 최초의 서원이 있고, 조선조 유학의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청 서기(徐起)의 유적이 남아 있다.

항간에는 그 분의 출생과 관련된 공암의 바위 굴 이야기나 전설적인 이적(異蹟) 행위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학문적 검증을 거친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관한 그의 업적이 더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그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과 도학자로 이름 높았던 이중호에게 배웠기 때문에 자연히 학문의 성격이 도학 쪽과 관련지어 그런 인물평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한다. 이곳에는 그의 호가 된 고청봉(孤靑峯) 아래 그의 묘소가 있다.

하늘을 적신 효심

공주 시내에서 대전 쪽으로 나가다 보면 옥룡동사무소가 있는데 그 오른쪽 언덕에 비각이 하나 서 있다.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지만 이 비석의 주인공은 이복이란 이름을 가진 효자다. 그는 매일 따뜻한 국을 얻어다 부모를 봉양했는데, 어느 날 그 국을 엎지르는 바람에 그곳에 국고개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한편 다른 기록에 보면 고려 때 지금의 옥룡동에 살았던 이복(李福)은 관리 생활에서 쫓겨나 밥을 얻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병석에 누우신 노모가 잉어를 드시면 낫겠다는 의원의 말을 따라 잉어를 잡으러 추운 겨울에 얼어붙은 금강에 나갔으나 잡히지 않아 얼음 위에 앉아 통곡을 하고 있으니 얼음이 갈라지며 잉어 한 마리가 뛰어 나와 이 잉어를 잡숫고 어머니의 병이 낫게 되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또 여기서 논산 쪽으로 나가다 보면 신기동 효포라는 곳이 있는데 도로의 오른쪽에 큰 정자나무와 함께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이 비석의 주인공은 ‘향덕’이란 사람이다. 그는 기록에 나오는 제일 오래 된 공주 사람 중의 하나로 국가로부터 표창을 받은 유명한 효자이다.

그는 병이 난 어머니를 위해 겨울에 잉어를 잡으려고 자기 허벅지 살을 도려내고 얼음 속에 다리를 담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피가 고여 냇물 바닥이 붉게 되었다고 해서 지금도 그 앞 시내를 ‘혈흔천’이라고 부른다.

암행어사의 표본

우리는 어려서 민중들의 구세주였던 암행어사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탐관오리를 찾아내어 추상같이 응징하고, 억울한 백성들의 한을 시원하게 풀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에는 민중들의 염원이 개입되어 과장된 것이 많고 조작된 것도 많이 끼어 있다. 이들 암행어사 가운데 가장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는 분이 박문수다.

그는 유성(당시는 공주 관할이었음)에서 태어났고, 만년에 공주 교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도 그가 살았다고 하는 집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기호학파 선비의 마을

공주에서 대전 쪽으로 가는 구도로의 오른쪽에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 충청5현의 한 분으로 꼽히는 초려 이유태 선생의 유적지가 있다.

그는 송시열 등과 효종의 북벌 계획에도 참여하는 등 노론에 가담했었지만 후에는 독자적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손자 이단장도 직간에 능했던 선비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그들의 유물과 많은 전적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최근 복원된 용문서원, 그리고 한말 충의를 실천한 성암 이철영을 제향한 숭의사도 있다.

이 왕촌(중동골)마을은 전통적 양반 선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무덤이 있는 승려

불교의 승려들은 사후 화장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다비 후에 남은 유골을 보관하는 것이 탑이고, 부도이다.

그런데, 일반인들처럼 무덤을 남긴 스님이 있다. 공주에서 논산으로 가는 길에 계룡면이 있고, 그 면소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허당 영규대사의 묘소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 갑사에서 수도하던 중 구국의 일념으로 기병하여 곳곳에서 관군과 합세하여 청주성 전투 등에서 큰 전공을 세웠고, 중봉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하였다.

면사무소 앞에 영규대사비와 정려가 있고, 갑사 표충원에는 서산대사, 사명당과 함께 그를 배향하여 기리고 있다.

그의 호국 정신을 현창하고 기리기 위해 묘소 주변을 정화하여 해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갑사에서는 그를 기리는 학술 발표회도 개최한 바 있고 또 불교식의 제향을 매년 올리고 있다.

노량해전의 영웅

임진왜란 당시 영웅으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 못지않게 해전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공주 출신 유형 장군이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시고 난 후 수군의 총책임자가 되어 남긴 업적이며, 북쪽 함경도 지방의 성을 쌓고 적을 물리친 일은 역사에 빛나는 위업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도 작전을 짜거나 전투를 할 때 유형 장군과 늘 상의하여 수행하였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위명에 가려 빛을 못 보아서 그렇지 실로 노량해전의 승리에는 유형 장군의 공로가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는 장기면 출신으로 현재 장기면 하봉리에는 그를 기리는 충렬사가 건립되어 있다. 하봉리는 2012년 세종시로 편입됐다.

조선 초기 충성의 큰 별

이성계의 조선 건국 후 어지러웠던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은 왕이 세종대왕이다.

그는 훈민정음이라는 세계 문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과학적 표음문자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지만, 과학 발달, 농사 기술 보급, 국방의 기틀을 확고히 한 일도 대단한 위업이라 할 것이다.

그를 도와 국방의 초석을 공고하게 다진 일을 맡은 인물이 바로 김종서 장군이다. 그는 의당면 월곡리에서 출생했으며(현재 의당초등학교 뒤편), 세종대왕을 도와 육진을 개척하는 등 북방의 적을 막는 국경을 튼튼하게 하였으며, 고려사를 새로 쓰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세종 사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타할 때 가장 먼저 제거당한 인물이 바로 그다. 그만큼 그는 강직하고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현재는 세종시에 속해 있지만 옛 장기면 대교리에 그의 한 쪽 다리만 묻혔다고 하는 묘소가 있다. 하봉리는 2012년 세종시로 편입됐다.

삼형제의 충혼

우성면 귀산리에 삼의사라는 사우가 있다. 바로 노응환, 응탁, 응호 삼형제를 기리는 곳이다. 이들은 노세득의 아들로서 일찍이 공주 목사였던 중봉 조헌의 문인으로 공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이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 이에 이들 삼형제도 조헌의 의병에 합류하였다.

여러 곳에서 싸우다가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된 곳이 금산 전투다. 우리에게 칠백의사로 알려진 이 싸움에서 이들 삼형제는 모두 전사하였다.

하나도 아니고 한 집안의 삼형제가 한꺼번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은 대단한 애국심의 표상이라 할 것이다.

가사 문학의 대가

공주는 다른 지역 사람에 의해 문향(文鄕)이라 일컬어져 오면서도 사실 국문학사상 뛰어난 문학 작품을 남긴 문학가가 거의 없는 곳이 공주다.

그런 가운데도 조선 후기 가사 문학의 대가인 퇴석 김인겸을 가진 것은 공주의 자랑이라 할 만하다.

그는 공주 무릉동에서 태어났으며 홀로 글공부를 하다가 아주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는데, 57세에 뛰어난 실력의 문장가가 아니면 뽑히기 어려운 일본 사신의 수행원으로 발탁되게 된다.

일본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돌아와 지은 것이 저 유명한 ‘일동장유가’이다. 이를 기리기 위한 문학비가 전국 국문학 전공자들의 발의로 전막의 금강 변에 세워져 있다.

직간으로 이름 높은 충신

유구읍 추계리에 고간원이란 유적이 있다. 고려 시대 의종, 명종 대에 걸쳐 목숨을 걸고 임금의 잘못을 간했던 문극겸이 만년에 살다가 운명한 곳이다. 이곳에는 고간원도라는 그림이 있었고, 그에 따른 시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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