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중회 원장

매년 백제문화제 때마다 백제기악을 올리게 된다. 공주와 부여는 각각 자기의 지역에서 공연하게 되는데, 그 주체는 공주는 '백제기악연구회', 부여는 '백제기악보존회'이다.

이 백제기악은 대사가 없는 가면극[탈춤]이고 마당극 형태이다. 배우가 가면을 쓰고 마당에서 올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백제기악은 심우성[객관적인 논리 체계를 위하여 선생 칭호는 사용하지 않기고 한다. 다른 사례도 이와 같다.] 즉 공주민속극박물관장이 일본에서 공연하는 기악에다가 양주별산대의 가면극을 섞어서 만든 ‘버전’이다. ‘심우성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아래부터는 논의의 전개상 ‘심우성’의 영자 Sim-Useong에서 S를 써서 ‘S-버전’이라고 하겠다.

S-버전을 만들기 위하여 심우성은 아버지 소민까지 동원하였다. 그는 여러차례 일본에 다녀왔고, 백제기악 복원에 매달리던 천리대학교 좌등호사佐藤浩司 교수와도 친분을 쌓았다. 소민을 나무탈 명인이었다.

심우성은 소민을 모시고 일본에 가서 백제기악 가면이 소장된 정창원, 동대사 등을 돌아다녔다. 결국 정창원의 백제기악 가면을 제작하여 오늘날 공주와 부여 백제기악을 올리는데 기초가 되었다.

심우성은 몇 차례의 학술세미나를 공주와 부여에서 열어 사계의 권위자 즉 연극계의 서연호[고려대학교 교수], 음악계의 권오성[한양대학교 교수], 무용계의 이애주[서울대학교 교수], 일본학계의 좌등호사[천리대학교 교수]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백제기악》을 동문선에서 출간하였다. 백제기악보존회의 이름으로 출간되었지만, 그가 낸 것이었다. 그 책에는 <중국의 기악>으로 구중회[공주대학교 교수]가 공동 저자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심우성을 이와 같은 노력을 통하여 S-버전을 완성한 것이다. 원래 이 버전은 1950년대 후반 이혜구가 ‘양주별산대놀이와 일본의 ‘백제기악’이 서로 상관성이 있다‘는 논문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612년 백제인 미마지가 ’오나라‘에서 배운 기악을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중간에 소실되었다가 13세기에 다시 복원된 것이었다. 당시 동대사를 비롯한 절간과 일본왕실에서 사용하던 가면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와 같이 학술적 준비와 가면들을 구비한 뒤 공주와 부여의 백제기악 관련 단체를 만들고 실습을 시켜나갔다. 그러면서 연습생들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천리대학교 백제기악을 관람시기도 하였다.

그 결과 오태근, 최선[이상 공주], 송건호[부여] 등이 실전 혹은 안무로 뛰어들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백제기악이 탄생한 것이다. 왜 ‘심우성 버전’이라고 하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S-버전은 하나의 발자취를 남겼지만, 몇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1) 말[무언]이 없는 가면극이므로 청중과의 소통에 다소의 어려움이 있고, 2) ‘백제기악’임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악기가 등장하지 않으며, 3) 기악은 본래 종교[불교] 음악인데 거의 그러한 요소가 드러나지 않는 후대의 변종이라는 것이다. 4) 그 뿐이 아니다. 백제기악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오해는 ‘오나라[吳國]에서 왔다’는 지식상의 오류이다. ‘

오나라’가 아니라 ‘오노래[吳歌]’가 온 것이다. 이혜구를 비롯한 일본학자들까지 이들은 612년대의 백제와 중국역사에서의 ‘오나라’의 시기가 맞지 않아 수없는 학설들을 만들어냈다.

‘吳’가 중국 지역이 아니라 우리나라 지역으로 황해도 봉산에서 전라도 지명에서 일본식 발음과 인데 이 범위를 벗어나지 ‘저지른 백제기악에 대한 지식의 오류’가 오늘날까지 바로 잡지 못하고 그대로 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S-버전의 이러한 결함을 보강한 것이 K-버전[여기서 K는 ‘구중회'의 영자 Koo-Junghoe에서 K를 사용한 것]이었다.

S-버전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기악이 다시 수입되면서 우리나라에 남아 있던 백제기악적 요소를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이와 비교하여 K-버전은 서역의 요소를 내재되어 있는 불교음악인 기악이란 점을 착안한 것이었다. S-버전은 무대가 마당극의 형태이다.

기악이 원래 '마당극'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왕실이나 나라에서 운영하는 절간에서 마당극 형태는 예의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무대가 설치되었을 것이다.

《고려사》를 ‘채붕彩棚’ 즉 비단으로 꾸민 누각형의 무대설치가 등장한다. 적어도 채붕과 같은 무대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가설을 전제로 불교가 들어온 경로를 조사하다가 돈황 막고굴에서 기악의 무대[벽화]를 찾아낸 것이다. 이미 말한 바대로 기악은 불교음악이란 용어이다. 부처의 말씀[설법]에 대한 ‘환희’를 노래와 춤, 그리고 재주 등으로 올리는 ‘공양’물이다. 오늘날 K-팝과 같은 예술 형태로 상상하면 좋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등식이 될 것이다.

불교기악 = 노래[음악]+춤[무용]+놀이[잡희]

이것이 천축[인도]에서 보이던 종교 음악의 모습이었다. 돈황의 벽화에서 이러한 그림을 확인한 것이다. 백제기악의 ‘설치 무대’를 찾아낸 것이다.

그 가운데 8면이 있는 <부모은중경> 무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K-버전의 처음 작품으로 <부모은중경>을 올려보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K-버전을 확보하게 되었는지 잠깐 짚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백제기악을 연구조사하기 위하여 유입되는 육상 통로인 서역 4차례[돈황, , 투르판 등- 양관, 장액, 과시 등- 우즈베키스탄- 운남]를, 해상 통로인 동남아를 2차[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2회, 태국의 치앙마이 1회]를 다녀왔다. 현장 답사는 물론이고 결코 적지 않은 수량의 해당 문헌들이나 일부의 악기도 구입해왔다.

처음 실크로드를 간 것은 1990년이다. 돈황학회[당시 회장 이수웅 교수]를 따라간 것인데 이때는 백제기악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본격적인 답사 연구는 2000년 부근이니 15여년이 경과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기악에 관한 기악의 지식들은 2012년 충청남도 역사문화 연구원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열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유는 백제문화제 추진위원회에서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게 제안한, 백제기악 세미나 개최를 거절한 것을 다시 추진하는 역할을 내가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백제문화재 추진위원회 사무실에 가서 이를 브리핑하였고, 결국 연구원의 강종원 박사와 상의하여 국제학회가 열린 것이다.

나는 당시 “자료를 통해 본 백제기악”을 발표하였는데 당시의 토론좌장이 원로 음악학자인 송방송[한국예술대학교 교수]이었다. 연구원에서 국문학을 하던 구중회에게 부담이 되어 ‘자료’를 조사 발표하도록 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K-버전이라고 스스로 말할 만큼 나는 많은 노력을 기울렸고 그 성과도 있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나는 이 성과를 바탕으로 《K-팝과 백제악의 무대》[임시 제목]라는 저서를 집필하고 있는 중이다[이 글도 그 일환의 하나이다].

‘백제악기’라고 하면, 보통 금동대향로의 5악기가 떠오른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 의하면 7악기가 일반적이다.
그 가운데 ‘공후’가 있다. 나는 국문학도로서 대학에서 정년 때까지 국문시가를 강의해 왔다. 고대시가는 역사의 맨 층인 고조선의 공무도하가[원 이름은 공후인]부터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늘 따라다니는 의문이 왜 ‘인引’이 붙어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중국의 악부시에서 공후인이 등장하고 ‘상화相和’의 형식이라고 했다.

상화에서 먼저 부르는 6인[공후인, 궁인, 상인, 각인, 치인, 우인]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맨 앞이 공후인이었다.

청중들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하여, 술병 든 미친 남자와 공후를 든 여자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백제 때도 역시 이러한 형식이었다고 생각된다. 공후는 고조선의 악기일 뿐만 백제의 악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한나라의 음악인 상화가 남북조시대에는 이 상화에서 오노래吳歌와 서쪽곡조西曲가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백제시대는 중국의 남조[송, 제, 양, 진]와 일치된다.

이때 남경을 중심으로 유행한 음악이 오 지역의 노래와 서쪽 지역의 서쪽 곡이었던 것이다. 이 곡이 백제에 들어온 것이다. 오 지역의 노래[오가]는 천축[인도] 등 서역 음악의 영향을 받아 7 음계였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최신의 유행곡이었던 것이다. 제 나라 임금[소위 황제]이 백제악을 국가음악으로 채택한 것도 흥미로운 사건이다.

우리는 보통 중국에서 음악을 수입해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관념일 뿐이다. 남조인 송에서는 잃어버린 한나라 음악의 DNA를 찾기 위하여 외국에서 음악을 받아들였다.

송나라는 백제 음악을 다섯 차례나 수집해갔다. 그것이 결국에는 수나라나 당나라의 7부기, 9부기, 10부기 등의 문화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612년에 미마지가 일본에 전해준 백제음악의 실체이다.

그러면 앞으로 K-버전은 어떻게 운용될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S-버전은 품목이 하나밖에 없어서 너무 빈약하였다.

이번에 K-버전으로 <부모은중경>을 공연한다면 백제기악의 버전은 2종으로 어느 정도 전망을 해볼 수 있다. 앞으로 K-버전을 계속해서 돈황벽화에서 발견한 아미타여래경 등을 발굴한다면, 더욱 백제기악은 풍성해질 것이다.

이러한 돈황벽화에 의거한 백제기악이 풍성해진다면, 무령임금 부부의 2차 장례식 과정이라든지 백제사찰 건립 등도 백제기악으로 연출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이 K-버전을 발굴 공연하는 의의가 될 것이다. 백제기악과 관련된 논문[이혜구]이 저서발간 1957년[발표 1953년]으로 공인화된 후 2015년 60년만에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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