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따라 공주에 와서 승승장구


윙윙, 달그닥, 달그닥, 덜그덕, 덜그덕…….

공주시 신관동 주공 떡 방앗간에는 구수한 콩설기기계, 가래떡 뽑는 기계가 열심히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다.

▲ 주공 떡 방앗간의 내부모습

이필순, 오종일부부가 이곳 공주시 신관동에서 주공 떡 방앗간을 운영한지 11년째. 이씨 부부는 “경기도 안양에서 철물점을 운영했을 때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갔었다”고 회고했다.

“그 시절은 너무도 힘들고, 정말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시절 이었다”는 이필순씨는 공주시 의당면이 고향인 친구가 있어 가끔 들렸던 게 인연이 되어 ‘친구 따라 강남 온다’고 공주에 오게 됐다고 한다.

▲ 시내에 다녀온 남편 오종일씨가 물건을 나르고 있다.

방앗간을 시작할 당시 이필순씨의 남편 오종일씨는 49세. 늦은 나이에 직업을 바꾸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응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건 왜 하려하느냐?”며 다들 만류만 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떡 방앗간일은 무척 부지런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엄청 부담됐지만, 당시의 이필순씨에게는 더 이상 선택할 카드가 없었다. 몸도, 여건도 여의치 않았지만, 이 씨는 현실에 순응해야 했고, 떡 방앗간 일을 고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방앗간을 열고 맨 처음 주문을 받은 것은 절편. 모양, 크기, 맛이 고르게 만들어져야 할 절편이 제각각으로 태어났다.

그러자 주문한 사람은 “무슨 떡이 이러냐?”며 질책을 쏟아냈다. 이 씨는 이런 실패를 거듭해 가면서 이를 악물고 배웠다.

▲ 2003년 전국노래자랑 출연당시 송해선생님과 인터뷰하는 이필순씨 옛 사진

그 뒤 2003년 공주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렸다. 이 때 이필순씨 가족은 '주공 떡방앗간'을 알리자는 의도로 출연, 방송을 타게 됐고, 전국방방곡곡에 알려졌다.

▲ 2004년 아침마당 출연당시 모습

이어 아침마당에 출연제의를 받게 되고, 방송에 출연하여 노래대결에서 1승을 거뒀다. 이러한 일들이 지금은 가족의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 2004년도 아침마당 출연당시모습

아침마당과 전국노래자랑의 출연으로 알아봐 주는 사람이 늘면서 주공 떡 방앗간은 순식간에 알려졌고, 매출도 조금씩 상승세를 타게 됐다.

▲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해 받은 수상메달이 벽에 걸려있다.

이로써 이필순씨는 절박했던 삶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다. 떡 만드는 솜씨도 제법 나아지고, 주위에서 도와주는 분들도 많아지면서 경제적으로 나아지게 됐다고 한다.

▲ 주공 떡 방앗간에서 만든 떡

이 씨는 떡 방앗간에 놀러오거나, 떡을 주문하기 위해 오시는 분들과 함께 그때의 사진을 보고는 웃고, 이야기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이필순(오른쪽)과 친정엄마(심정애)가 마늘을 까며 옛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인생은 복불복’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순간에 하게 된 떡 방앗간은 우리가족을 살려준 참 고마운 존재입니다. 그때 만약 이 방앗간이 없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그 어렵고, 힘들었던 지난 세월을 담대하게 말하는 이필순씨.

이 씨는 험난했던 삶의 순간을 슬기롭게 받아들이며 견디었고, 지금의 행복을 이루었다. 그런 그녀가 참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이필순씨는 오늘도 방앗간에서 친정엄마와 마주앉아 그 시절을 이야기 한다. “엄마 나 그때 무지 힘 들었어.”

▲ 이필순씨의 친정어머니 심정애할머니

친정엄마는 그런 딸에게 “아무리 내가 힘들더라도 남에게 해 끼치고 살면 안 되는 겨. 착하게 살아야 혀. 그래야 복 받는 겨”라고 답한다. 돌아오는 길 이필순씨의 팔순 친정엄마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주공떡방앗간 ☎041-881-7336
공주시 신관동 671-2 신관파출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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