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가 낳은 ‘민속학자’이며 ‘1인극배우’인 심우성 옹(81세)을 서울 관훈동 ‘푸른별 주막’ 문간방 ‘극단 서낭당’에서 만났다.

처음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2014년 1월 5일 오후 12시 30분, 장소는 종로경찰서 앞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약속 시간보다 20여분 빨리 그 장소에 도착, 전화를 걸게 되었다.

마침 앉을 만한 의자가 있어서 편하게 기다리게 되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두 아가씨가 다가와 “종로경찰서가 어디냐?”고 물었다. 외국인 학생이었다. 아가씨가 갈 때는 한국말로 “감사 합니다”라고 했다. 심우성 옹이 지금 머물고 있는 ‘푸른별 주막’은 인사동 바로 거기였다.

심 옹은 수염을 기르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1934년생이니 우리나라 나이로 81세이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눈빛은 형형하고, 세상을 꿰뚫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아서 간 곳이 ‘푸른 별 주막’이었다. 원래 이 집은 제자인 최일순이라는 분이 제공했다고 한다.

원래 10여 평이 될까 말까한 이 작은 집은 이름 그대로 주막인데, 마침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영업장임을 느끼지 못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집에 돌아와, “이 집이 얼마나 가겠소?” 하고 물었더니 현재 소유자인 제자가 7억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심옹이 머물고 있는 곳은 ‘푸른 별 주막’ 문간방으로 1평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장들로 배치되어 있어서 집필하기에는 적절해 보였다. 마침 책상 위에는 작성하던 원고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다고 했다. 그곳도 이명선이라는 제자가 제공했다고 한다.

서울을 떠나 공주를 거쳐 현재는 제주도에서 살다가 10여 년 만에 돌아왔는데, 주위 사람들이 잊지 않고 있는 듯하였다.

이 외에도 친구인 전 윤보선 대통령 둘째 아들도 “자기 집에 있으라”고 권유한다고 한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사양했으나,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푸른 별 주막’을 찾아온다고 한다.

현재 심우성 옹은 출판사 민속원과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국 민속학의 기억과 기록》[2013. 8. 20]과《통일 아리랑》[2013. 12. 30]은 작년에 작업을 끝낸 성과물이었다. 앞의 것은 직접 쓴 것이고, 뒤의 것은 엮은 것이었다.

《한국 민속학의 기억과 기록》은 2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부분이 민속학자[이능화, 손진태, 송석하]를 다음 부분이 민속학의 발자취와 사상적 배경 등을 논의하고 있다.

‘조선학의 선각자 이능화’, ‘방법론의 개척자 손진태’, ‘조선 민속과 송석하’ 등이 논의의 대상이었다.

심옹은 우리나라 민속학의 본격적인 출발점을 1927년[《계명》제19호]으로 보았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와 최남선의《살만교차기》가 실렸기 때문이었다.

인터뷰 마지막 단계에서 앞으로 민속학의 미래와 방향을 물었다. 그런데 답변은 의외였다. “지금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로 학자가 아직까지도 ‘모색 단계’라는 말씀은 물론 그대로 받아드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끊임없이 문헌적 연구와 현장 확인 등을 통한 정리 단계의 방향 모색이라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한국 민속학의 기억과 기록》의 후반부 ‘문화와 민중의식’에서 민속학의 모색이라는 열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심옹의 글들은 새로이 작성한 것이라기보다 그동안 지면을 통하여 피력한 것들을 종합 정리한 것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통일 아리랑》은 심옹이 엮은 책이다. 역시 총2부로 구성되었는데, 제1부는 학자들의 논문이고 제2부는 각 지역의 아리랑 모음집이다.

논문은 진용선의 ‘정선 아리랑의 보존과 전승’, 서정매의 ‘밀양 아리랑 보존의 필요성에 관한 제언’, 박병훈의 ‘진도 아리랑의 유래와 현황’, 최창호·홍강성의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등이다.

대표적인 아리랑이 정성·밀양·진도에 있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를 만든 것이 라운규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짐작된다.

제2부는 심옹이 보는 아리랑과 신경림, 김연갑, 조규익·조용호 등이 찾아 나선 아리랑 관련 글들이다. 심옹이 《통일 아리랑》을 엮은 것은 결국 아리랑의 사랑 때문이다. ‘시작의 이야기’에서 쓴 것처럼 외형적인 책의 묶음이라기보다는 그 ‘이전에 마음 깊이 통일하고 싶은 아리랑’이라고 힘을 주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아리랑’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여, 4·3 고개를 넘어간다.’ 등의 1인극을 올린 바 있다. 사석에서 들은 바로는 ‘본인이 처음 우리나라 지도에 파란색을 칠한 깃발을 1인극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면 민속원과 연관하여 얼마 동안 무슨 내용을 집필하려는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민속원 홍기원 사장과는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인데, 심우성 옹이 내고 싶은 책이 있다면, 아무 이유 없이 모두 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작업 중인 것은 민속학 관련 수필집으로 총 60꼭지로 구상하고 있는데, 이미 30여 꼭지를 썼으며, 2월중에는 나오지 않을까 한다”고 밝혔다.

심옹은 매일 원고를 쓰고 있고, 그 원고의 일부는 어느 잡지(제목은 잊어버렸다)에 연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좁은 연구실에서 자료도 없는데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시냐?”고 물었다.

그는 태어나기만 공주에서 했지, 사실은 서울 사람이다. 서울의 민속현장을 체험으로 겪었다는 이야기이다. ‘기억’과 ‘현장 확인과 자료[주로 사진]’를 통하여 글을 쓰니 생동감이 있다고 보여 진다. 기대가 된다.

언제까지 서울에 머물 지에 대한 답변은 듣지 못했다. 작업과 관련된 일정일지도 모른다. 헤어지면서 그는 “이제 집도 자주 찾아와서 만납시다”고 웃었다.

 

여기서 한 가지 첨가해 둘 것이 있다. 필자는 심우성 옹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백제 기악에 관한 책을 하나 내자는 것이었다.

백제 기악의 연구는 심옹 부자지간에 시작하여 일단락을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악 탈은 심옹의 아버지 소민 선생이 만들었다. 그리고 ‘1인극 배우’답게 백제 기악을 복원하여 무대에 올리는 데까지 성과를 올렸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612년 일본에 전수한 백제 기악의 일본인들의 발전 시켜 나간 과정과 정창원에 소장된 탈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 복원한 시대까지이다.

612년 백제기악이 중국 오나라 배워온 것이라면, 그 이전 즉 중국에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는 규명이 남아 있다.

여기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과정을 모색한 것이 심우성 옹이 엮어낸 성과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고, 천축[인도] 등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는 과정 등은 아직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필자가 2012년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바 있다.

1) a 서역에서 중국으로, b 중국에서 백제로, c 백제에서 일본으로 간 경위와 내용을 정리하고, 2) [현재 일본에서 진행되는 백제 기악을 바탕으로 복원된] 우리나라에서 무대에 올려진 백제기악에다가 서역에서 중국까지의 영향도 넣어서 보다 풍성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종합적인 백제 기악 연구가 나와야 한다고 본다. 그 책의 구성은 제1부 현재까지 복원되었거나, 복원될 백제 기악, 제2부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백제기악[구중회], 제3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온 백제 기악[심우성] 등으로 묶어야 한다.

우리는 책[종합본 백제기악]을 내기로 약속했다. 하여튼 심우성 옹의 서울 생활은 원로 학자가 어떤 자세로 학문을 대하여야 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더욱 건승하시고 하는 정리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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