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인의 죽은 시인들의 나라-18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오늘날 인터넷 ‘다음’과 ‘네이버’를 클릭해 볼 때, 가장 많은 수치로 선호도가 기록되는 시는 김춘수의 「꽃」이란 작품이다. 일견 놀라운 느낌이 아닐 수 없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윤동주의 「서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정지용의 「향수」, 고은의 「그 꽃」 같은 시들이 뒤를 따르지만 단연 선두는 김춘수의 「꽃」이다.

그렇다고 독자들이 김춘수란 시인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것과는 별개다. 오직 「꽃」이란 시만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편의 시가 가진 매력이라 할 것이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일이다.

아마도 1999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부여에서 열린 한국시인협회 세미나의 자리에서 김춘수 시인을 만나 “선생님의 대표작은 「꽃」이시지요?”라고 말했다가 엉뚱하게도 시인한테 역정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인은 얼굴까지 벌게지면서 “누가 그런 말을 해요?”하면서 되물었던 것이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싶었다. 당신의 대표작을 묻는데,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김춘수 시인의 일생의 고뇌와 비밀한 사연이 들어있다.

김춘수 시인은 본래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서양 시인들의 시에 영향 받으면서 시인이 된 시인이다. 이 시도 그런 계열의 시라고 볼 수 있다. 1952년도 발표된 시라고 하고 맨 처음 시집에 수록된 것은 1959년에 발간된 『부다베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란 시집이다.

한 동안 시인은 그런 계열의 작품으로 일관해왔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무의미 시론’이란 걸 들고 나왔다.

한국시에서의 무의미 시론이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시는 언어로 표현된 예술작품이고 언어는 또 의미(meaning)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시에서 의미를 빼고 무의미 시론을 전개한다는 건 처음부터 만용이요 어불성설이었다.

이렇게 나가다 보니 당신의 초기 작품 가운데 하나인 「꽃」이란 시가 걸리고 특히 이 시의 끝 부분에 나오는 이런 부분이 많이 마음에 켕겼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런 구절이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여기서 ‘의미’란 말을 어찌하며 좋을까? 고심 끝에 시인은 ‘의미’란 말 대신에 ‘눈짓’이란 말로 바꾸게 된다.

그래서 이 시는 두 가지 버전을 가지고 있다. 강의 같은 것을 할 때 나이든 사람들에게 물으면 ‘의미’라고 대답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물으면 ‘눈짓’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그 때 당신의 대표작을 물었을 때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랬던 것이구나, 짐작이 간다. 그러나 저러나 시인의 대표작은 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독자들이 하는 일이다. 그것을 이런 경우가 잘 보여주고 있다.

여타 꽃에 관한 시들이 영탄과 정감으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김춘수 시인의「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매우 사변적이고(형이상적이고) 의식의 밑바닥을 말갛게 들여다보는 관조로 되어 있다.

그것은 나와 너, 인간과 사물의 관계성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관계성 안에서만이 모든 것들이 가치가 있고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시인의 주장이다.

어쨌거나 이 시는 독자들로부터 무한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왜 그럴까? 아무래도 ‘꽃’이란 시의 제목 하나 때문은 아닌 것 같고 내용이 문제인데 그만큼 사람들은 관계성 안에서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많이 느끼고 그 안에서 꽃피우는 그 무언가 아리땁고 사랑스러운 세계를 희구한다는 한 좋은 증표일 것이다.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시인은 경남 충무 출생으로 일본에서 유학했으며 1946년 동인지 <노만파>로부터 시작활동을 시작했고 첫시집 『구름과 장미』이후, 『인인』『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타령조 기타』『처용』『김춘수시선』『꽃의 소묘』『남천』『비에 젖은 달』『처용 이후』『처용 단장』『서서 잠드는 숲』등 여러 권을 출간했으며 다수의 시론집을 내놓기도 했다.

시인은 대학교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했으며,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이 1928년 권재순 여사와 결혼식을 올릴 때 김춘수 시인이 화동으로 참석했다는 건 또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이다.

두 분의 나이가 14년 차인데 김춘수 시인이 마침 권재순 여사가 원장으로 있던 유치원의 원생이었음이 그 까닭이겠다. 이 또한 김춘수 시인이 들으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낼 일이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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