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저린 꿈에서만

전봉건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 속에 빛나는 돌멩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하겠습니다.
우물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의 일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한 바가지 드시고
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가만히 옮기시던
그 발걸음 하나하나
조용히 웃으시던
그 얼굴의 빛무늬 하나하나
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만은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것만은
내가 그리질 못하고 말도 못합니다
강이 산으로 변하길 두 번
산이 강으로 변하길 두 번
그러고도 더 많이 흐른 세월이
가로세로 파놓은 어머님 이마의
어둡고 아픈 주름살.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말로 하려면 목이 먼저 메이고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그림으로 그리려면 눈앞이 먼저 흐려집니다.
아아 이십 육년
뼈저린 꿈에서만 뫼시는 어머님이시여.

내가 전봉건 선생을 처음 만난 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1971년의 가을, 계룡산 동학사에서였다.

마침 제1회 한국시인협회 세미나가 열린 때였는데 그 자리에서 박남수 선생이 전종건 선생을 소개해주었다.

박남수 선생은 박목월 선생과 함께 나의 신춘문예 심사위원 가운데 한분이셨는데 시단에 처음 나온 햇병아리 시인이었던 내가 아무래도 외롭고 발표지면도 없을 것 같아 전봉건 선생을 소개해준 것이리라.

박남수 선생은 북한 출신으로 전봉건 선생과 자별한 사이였고 또 전봉건 선생은 당시만 해도 유일한 시 전문 잡지였던 <현대시학>의 창간인이며, 주간이었다.

박남수 선생의 짐작은 적중해서 그 이후 전봉건 선생은 나를 집중적으로 잡지에 소개해주었고. 첫 시집 『대숲 아래서』를 제작해주기까지 했다.

두 분 모두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시지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젊은 시절 우리는 이렇게 누군가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기도 하고 세상을 더불어 살도록 되어 있다. 이런 걸 더러 사람들은 더러 ‘인덕이 있다’라고 말하곤 한다.

전봉건(全鳳健 1928~1988) 선생은 평안남도 안주 출생으로 1950년 <문예>에 시 「원(願)」, 「사월」, 「축도」 등의 시가 추천되어 시단에 나왔고 시집으로 『사랑을 위한 되풀이』(1959), 『춘향연가』(1967), 『속의 바다』(1970), 『북의 고향』(1982), 『돌』(1984), 『트럼펫 천사』(1986), 『기다리기』(1987) 등 여러 권이 있으며 최근 『전봉건 시전집』이 출간되기도 했다.

전봉건 시인은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결코 서정성과 생명성, 현실성을 도외시하지 않았으므로 독자의 접근을 막지 않았고 편안하게 읽히면서 감동을 주는 작품들이 많았다.

초기엔 6․25 전쟁의 아픔에 대해서 주로 썼고, 중기엔 여러 가지 실험적이면서 환상적인 작품을 남겼다. 후기엔 ‘돌’과 ‘실향’의 주제에 몰두하면서 미학적이며도 현실감각이 있는 작품을 남겼다.

위의 시는 후기의 작품으로 시집 『북의 고향』에 수록된 시이다. 처음 이 시를 읽을 때 그다지 폭발력이 없어보였다.

함께 시집에 실린 다른 작품들에 비하여 분위기가 조용하고 고즈넉해서였다. 그러나 어느 때부턴가 이 작품을 시낭송가들이 즐겨 낭송하는 걸 보았다.

시 낭송가들이 낭송하는 걸 들으니 느낌이 영 달랐다. 가슴이 싸아 하니 아파오면서 시인의 깊고도 어두운 심연이 그대로 전달되어 오는 것이었다.

실향의 아픔! 북에 고향을 두고 야반도주하듯 떠나와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한숨과 고통이 바로 내 것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정말로의 실향의 아픔을 아는 사람은 실향을 당한 당사자들뿐이다. 그래서 섣불리 국외자들이 실향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거나 시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아픔을 함께 하는 일을 이 시가 담당해주고 있다.

시인의 고향 생각은 매우 미세적이다. 작은 것에 주목하고 거기에 목메어 하고 눈물겨워하고 가슴 아파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쉽게 흥분하고 거친 말을 내뱉지도 않는다. 다만 조곤조곤 가슴 속에 쌓인 한들을 풀어내놓는다. 실타래처럼 풀리는 시인의 음성 속에 정말로 아픔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의 숨결이 있고 그의 속내가 들어 있다.

그렇다. 남의 아픔과 상처를 이쪽에서 함부로 재단하러들지 말라. 그의 상처는 그의 상처일 뿐이다. 그는 그 상처를 일생동안 가슴에 안고 그것을 반추하면서 새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무릇 크고 번쩍이는 것만이 소중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작고 초라한 것들도 당사자에게는 엄청나게 큰 것이고 소중한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인정해주어야 한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전봉건 선생. 세상의 모든 질곡과 육신의 제약을 벗었으니 이제는 당신이 그토록 그리던 고향땅 북한에 돌아갈 수 있었을까?

그러나 돌아가 다시 보는 고향과 고향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 변했으므로 실망하여 크게 통곡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직 세상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나는 가끔 꿈에 선생을 보기도 한다. 선생에게서는 말똥 냄새 같은 것이 나는 것 같고 연분홍 와이셔츠 차림에 신색이 무척 훤하신 걸로 보아 저 세상에서는 매우 지내시기가 편하고 좋은 것 같았다.

물론 그토록 보고잡던 어머님도 상봉했을 것이고 김동리 선생의 소설 「밀다원 시대」에 자살한 시인으로 기록된 전봉래 형님도 만났을 것이라 믿는다.

‘찬란한 이 세기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하게 살기 위하여 미소로써 죽음을 맞으리다.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 라고 적었다는 선생의 형님인 전봉래 시인의 짧은 유서를 함께 읽는 마음이 심상치만은 않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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