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인물 탐구 –사과의 화가 이광복②

이광복 화백의 어머니가 이광복 화백을 임신했을 때 아버지가 바람이 났다. 어머니는 속이 상한 나머지 독약을 마셨고, 그 때문인지 이광복 화백은 어려서부터 아픈 곳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이광복 화백은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고, 항상 그림도구만 끼고 살았다. 부모님은 결국 이광복 화백이 중학교에 다닐 때 이혼했고, 남동생과 이광복 화백은 중학동에서 큰 어머니가 계신 금학동으로 옮겨 지내게 됐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재혼을 하자 눈치가 보여 이광복 화백은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동생하고 자취를 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으로 상을 많이 탔던 이광복 화백은 공주고에 다닐 때 미술부에 들어갔다. 미술부는 동기들은 물론이고, 선후배간의 유대감이 굉장히 좋았다. 당시 미술실 주변은 자연경관이 너무 좋은데다가 학교 건물과 떨어져 있어서 숙식을 하면서 형제처럼 지냈다.

홍대출신으로 꽤 이름이 알려진 김영욱, 임동식, 정관모 같은 선배들이 찾아와 후배들을 지도했다. 그래서 그런지 공주고 미술부는 전국 미술대회를 거의 석권하다시피 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공주고 미술부 선후배간의 유대감은 각별하다.

이광복 화백은 지금도 당시의 미술교사인 진문섭 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있다. 진 선생님은 이광복 화백이 대학에 갈 형편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진 선생님은 어느 날 아침 이광복 화백을 데리고 이광복 화백의 새아버지를 찾아가 “아이의 재능이 너무 아깝다”며 “대학에 보내자”고 저녁때까지 설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 선생님은 포기하고 나오면서 “광복아, 이제부터 너는 혼자 사는 법을 배워야 겠다”며 안타까워했고, 이후 이광복 화백은 공주를 떠나게 된다.

이광복 화백에게 있어서 공주는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이다. 금강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아침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행진곡에 맞춰 걸어가는 평화로운 정경이 보이는, 그리고 저녁이면 봉황산 아래에서 트럼펫 연주자들이 클래식을 연주하기도 하는 매운 아름답고, 서정이 깃든…….

그런 공주를 떠난 이광복 화백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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