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화백. 그는 기자가 가장 만나고 싶어 했던 화가였다. 그에 대한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의 그림을 인터넷을 통해 감탄을 해 가며 보았던 까닭이었다.

그런 그와 함께 공주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 가지고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2년 여 전 임동식 화백을 만나 뵈려 했지만, 그가 너무 바빴다. 이화익 갤러리에서 ‘비단장사 왕서방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동식 화백

그가 중학생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유구에서 의사로 있었던 까닭에 그는 삼천공녀가 운집해 문전정시를 이룬 비단의 고장 유구를 가슴속에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러한 그가 가슴속에 담겨있는 기억을 꺼내 화폭으로 옮기는 데는 수 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 기나긴 기간 동안에도 유구의 정경은 그의 기억 속에서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고, 명도와 채도를 기가 막히게 살린 명작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림이 아닌, 사진을 보는 느낌이었다.

▲비단장사 왕서방-소매장

임동식 화백을 처음 만난 느낌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의 예술가’라는 느낌이었다. 아프리카 어린이처럼 맑고 빛나는 눈을 가진 소박한 모습의 화가였다.

기자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분이 어떻게 ‘야투’, ‘예술과 마을’ 등 미술사의 새로운 획을 긋는 혁명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그 화두를 안고 무려 7시간동안을 그와 함께 하면서 얻은 결론은 그는 화가이기 이전에 사유하는 철학자였고, 미학자였으며, 자연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원시시대 인류가 자연에서 행했던 소박한 예술적 행위가 미술의 시작이요, 끝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예술가’란 해당 학과를 전공한 인텔리전트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캔버스가 아닌 자연 그대로가 예술의 도구였다. 
 

그런 그의 철학적 뒷받침은 ‘예즉농, 농즉예(藝卽農, 農卽藝)’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고, 공주시 신풍면 원골마을 주민들을 예술가로 변신시킴과 동시에 2만 여명의 관객을 몰고 오는 예술마을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1981년 ‘야투(野投 Field Shot. 돌로 던진다, 들에서 내게로 던져져 온다’는 의미)’ 창립취지문을 쓰고, 창립전을 개최하게 된다.

이 ‘야투’를 통해 자연은 인간에 의해 변형되고, 이용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교감하고, 사랑받고, 연구돼야할 대상으로 거듭나게 된다.

▲1981년 여름의 기억

이러한 그의 시도는 파란 눈의 외국인들을 매료시켰다. 공주 중·고, 홍익대를 나와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유학을 했던 그는 함부르크 대학의 학생들은 물론, 교수에게까지도 흠모의 대상이었다.

당시 임동식 화백은 함부르크 대학을 졸업하며, 해마다 함부르크에서 12가지 분야의 학문을 통틀어 단 한 분야, 단 한명에게만 수여하는 ‘학문과 예술의 후계자 장학금 ’아인슈티펜디움(Einstipendium)‘까지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후 귀국한 그가 금강에서 한 달 동안 개최했던 국제자연미술제에는 100여명이 되는 독일어권 작가들이 자비를 들여 참가하는 등 그에 대한 인기를 실감케 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평안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도 화폭에 담긴 익숙한 자연의 풍경, 꾸밈없는 소박한 그림 속 인물들, 최대한 절제한 붓 칠 때문이 아닌 가 싶다.

임동식 화백은 때로 자신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낯설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친구가 이끄는 장소, 친구가 알려준 풍경을 자연스럽게 화폭에 담은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좋은지 세월을 잊게 된다. 공주, 훌륭한 인물이 많아 행복한 도시다.

▲친구가 권유한 풍경 – 향나무Ⅱ

▲임동식 화백이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동식 화백이 전시회를 위해 완성해가고 있는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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