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절 우리 문단에는 ‘북에는 소월이요, 남에는 목월이요, 중도에는 용래’라는 말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는 일찍이 <문장>지에 박목월을 시인으로 추천하면서 추천위원인 정지용이 그 추천사에서 ‘북에는 소월이요, 남에는 목월’이라고 썼던 말을 패러디하고, 확장시켜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어로 쓴 서정시 가운데 그 극치점에까지 간 시인들을 찬양하는 문장이었던 것입니다.

박용래(朴龍來, 1935~1989) 시인. 충남 강경에서 태어나 당시로서는 명문이었던 강경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원이 되었다가 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김소운, 박목월을 찾아다니며 사사한 끝에 <현대문학>지에 투고,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시인이 되어 아름다운 이 땅의 서정시를 아주 많이 남긴 시인입니다.

누구는 말하기도 합니다. ‘박용래의 시를 읽지 않고서는 한국어로 된 서정시를 읽었다 말하지 말라’고. 그만큼 박용래의 시는 최고의 시요, 더 이상 올라갈 수도 내려올 수도 없는 정상급의 시라는 말일 것입니다.

특히, 박용래 시인의 「구절초」란 시는 참으로 사랑스런 시입니다. 어디선가 조그만 소리로 외쳐 부르는 누군가의 애타는 목소리가 아슴아슴 들릴 듯도 싶은 시입니다. 지금 그가 부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금 그가 애타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박용래. 이 땅의 가장 아름다운 시인 가운데 한 사람. 한반도 중부지방 의 말맛과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해낸 사람. 한 평생을 직업 없이 살면서 오직 시 하나 마음의 푯대로 삼아 외롭고, 서럽게 세상의 바다를 건너간 사람. 이제 다시는 이런 시인을 우리가 만나지 못한다 할 것입니다.

한때는 박재삼, 박성룡과 더불어 쓰리 박으로 불렸고 한성기, 임강빈과 더불어 충청권 삼가시인을 이루었으며 천상병, 김관식 등과 함께 기행시인으로도 불렸던 사람.

세상이 너무나 뻔질뻔질 광택이 나고 속도감이 붙어 어지러울 때 우리는 가끔 박용래의 느리고 허술한 시의 기차를 타고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하고 싶어집니다.

철커덕 철커덕 세월없이 가다보면 어디쯤 우리가 버리고 온 풍경이 있고 우리가 진정 사랑했던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까요? 그러합니다. 박용래의 시는 하나의 타임머신입니다. 그 타임머신이 데려다 주는 곳, 산기슭, 가을이 깊어 소슬바람 부는 어디쯤에 구절초 꽃도 피어 있을 것입니다.

구절초. 흔히들 ‘들국화’라 부르는 꽃입니다. 나 자신 젊어서는 ‘들국화’란 이름으로 시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구절초를 보고 쓴 시였습니다.

그러나 들국화와 구절초가 전혀 다른 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구절초, 들국화, 거기다 쑥부쟁이를 더하여 가을철 꽃이라 부릅니다. 물론 이들은 다 같이 국화과에 속하는 꽃입니다. 허지만 이름만은 분명히 구별이 됩니다.

말하자면 제각기 꽃마다 따라 붙는 이름이 다르다는 말이겠습니다. 이 세 가지 꽃과 꽃 이름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가을 산에서 제법 꽃을 안다 말할 만한 사람이겠습니다.

어쨌든 구절초, 새하얀 꽃으로 피는 가을꽃입니다. 필시 아홉 마디 줄기 끝에 피는 꽃이라 구절초였을 것입니다. 예부터 음력으로 9월 9일을 양수(陽數)가 겹치는 중양절(重陽節)이라 했고, 그 때쯤이면 구절초가 아홉 마디쯤 자라게 되고 그러면 이 꽃이 피어난다 해서 구절초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에서 가장 빛나는 구절은 도입부분과 결말부분입니다.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이 얼마나 절창인가요! 일단 ‘누이’를 지긋이 불러 놓고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라고 속삭일 때 우리는 사알짝 목이 메임을 느끼게 됩니다. 까닭 없이 그리워지고 까닭 없이 서러워지는 마음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감동입니다.

끝 구절은 더욱 절절한 감회를 줍니다. ‘여우가 우는 추분(秋分)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아, 정말로 그것이 그러했던가요! 추분 무렵에는 여우가 울었던가요? 그리고 도깨비불이 있었던가요? 더구나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구절초 꽃은 그렇게 새하얗게 피어나기도 했던가요? 다시금 ‘누이야’ 불러보는 마음은 차라리 아득한 메아리와 같습니다.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이 대목쯤에서 우리는 목구멍까지 끌어 올라와 지긋이 치미는 울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구절초란 것이 있었던가요? 구절초를 두고 이토록 애절하게 노래한 시인이 있었던가요? 다가오는 계절은 분명 봄철이로되 마음속으로 짐짓 서느럽고 하늘 높은 가을을 품어 볼 일입니다.
 

구절초

박용래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추분(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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