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암 이응노 화백 출생지 논쟁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미술작품을 선보여 유럽 예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나 1960년대에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많이 겪은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 1904-1989) 화백의 출생지를 놓고 예산군과 홍성군이 오랫동안 소모적인 논쟁을 벌려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 바 있다.

뒤늦게나마 이응노 화백의 출생지가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임이 밝혀지는 바람에 지루한 출생지 논쟁이 끝나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홍성군은 2010년에 이응노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세워 관광지로 개발하여 지역경제가 서서히 활성화되고 있다고 한다.

고우(古愚) 김옥균(金玉均) 선생은 구한말 목숨을 걸고 1884년 고종 21년에 갑신정변을 주도하다가 1894년 3월 28일 상하이 미국 조계 내의 일본 호텔 동화양행에서 홍종우(洪鍾宇, 1854- ?)에 의해 암살되어 양화진(楊花津)에서 능지처참되고, 그의 머리는 저잣거리에 효시됐다.

하지만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점이 많아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추앙받고 있는  김옥균선생이 타계한지 118년이 지난 지금 그의 출생지에 대한 논쟁이 끊이질 않고 계속 벌어지고 있다. 

이에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향토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하고 있는 향토사학자(국학박사)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2012년 6월 2일 토요일 오후 대전광역시 동구의 역사와 문화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은진송씨(恩津宋氏) 집장촌(集葬村)을 찾아 학술조사를 하는 도중, 김옥균의 출생지가 이사동이라는 안내간판을 우연히 보고, 나는 정말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충청남도와 공주시가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를 김옥균의 출생지로 보고, 각종 기념사업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충청남도는 1976년 12월 6일 김옥균 생가지인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를 충남 기념물 제13호로 지정하여 공표하고, 공주시에서는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에 유허비를 건립하고 안내판까지 건립하여 놓았다.

2. 고우 김옥균 선생의 출생지 논쟁

그리하여 나는 이사동 135-2번지에 거주하고 있는 송진국(宋鎭國, 69세)씨 댁을 방문하여 사우당효정공파종중(四友堂孝貞公派宗中)이 1984년 3월 대전 회상사(回想社)에서 발간한 족보인『은진송씨효정공파보 전(恩津宋氏孝貞公派譜 全)』을 잠간 빌려보았는데, 분명히 30페이지에 ‘김병태 자 김옥균 문과호조참판(金炳台 子 金玉均 文科戶曹參判)’으로 기록되어 있어 김옥균의 출생지가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족보 22페이지에 김옥균의 외조부인 송인덕(宋潤德, 1791-1822)이 이조참판을 증여받았다는 사실과 외숙인 송인식(宋寅植, 1818-1900)이 선비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으나, 김옥균의 생모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만 기록되어 있어 성함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한편 2012년 6월 6일 안동김씨 족보편찬을 주도해 온 김은진(金殷鎭, 84세)씨의 증언에 의하면, 안동김씨 대동보소가 1984년 12월 농경출판사에서 간행한 족보인『안동김씨 대동보 5권』1066페이지에는 김옥균의 출생지가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번지’로 기록되어 있고, 김옥균의 생모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만 기록되어 있어 김옥균의 생모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송진국씨와 김은진씨에게 이 족보들에 왜 김옥균의 생모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질문을 던져보았더니, 원래 은진송씨 족보와 안동김씨 족보에는 어느 파의 족보를 막론하고 예로부터 여자의 이름은 관행으로 기록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고 답변해 주어 의문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그리고『은진송씨효정공파보 전(恩津宋氏孝貞公派譜 全)』에는 분명히 김옥균의 출생지가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으로 되어 있고,『안동김씨대동보(安東金氏大同譜)』5권에는 김옥균의 생가지가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번지로 기록되어 있어 서로 상이한데, 왜 이제까지 김옥균의 출생지를 정확하게 바로잡지 않았는지 궁금하여 대전광역시 동구문화원에서 2006년에 발간한 한상수 저『은진송씨 집장촌 이사동』 김옥균 편을 찾아보았다.

김옥균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167-3번지 일대. 김옥균 선생 생가는 이미 오래 전에 헐리고, 그 자리에 두 번째로 새로 지은 붉은 벽돌집의 모습. 지금 이 집에는 송병준씨가 거주하고 있다.<2012.6.15일 오후 이사동 134번지에 거주하는 전 통장 宋吉準(66세)씨 증언. ; 김옥균 생가 사진은 산내동 사무소 직원인 현성용씨가 제공한 것임.>

3. 김옥균의 출생지는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청주대 국문과를 거쳐 단국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전대 국문과 명예교수로 있는 한상수(韓相壽) 선생은 그의 저서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결혼 초에 남자가 1년 또는 2-3년간 처가살이 하는 풍습인 서류부가제도(婿留婦家制度)가 있어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가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의 안산 모랭이 산 아래 위치했던 처갓집인 송인식(宋寅植)의 집에서 결혼 초에 처가살이 할 때인 1851년 1월 23일에 김옥균이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행정체제를 갖추지 않아 출생지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출생한지 21일 이내로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 제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출생 장소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지 않았다.

다만 반상(班常)을 구별하기 위해 조선시대 인물에 대한 각종 기록을 보면 시조의 고향이 되는 관향(貫鄕)만 표기했다. 게다가 조선시대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부계중심사회였기 때문에 신생아의 본적지는 아버지의 본적지를 따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김옥균의 생가지가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김병태의 본적지인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공 38번지로 잘못 기록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당시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과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 실제로 살아보지 않아 두 곳 중 어느 곳이 김옥균의 출생지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은진송씨효정공파보 전(恩津宋氏孝貞公派譜 全)』의 기록, 김옥균 출생 당시의 처가살이 풍습인 서류부가제도, 40여 년 전 공주 사람들이 이사동을 방문해 김옥균 장인이 살던 곳을 찾아와 집을 종이에 그려 가지고 갔던 점, 요 근래 공주민속박물관 심우성 관장이 김옥균 생가지를 둘러보고 간 것 등으로 미루어보아 김옥균의 출생지가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인 것 같은 심증이 간다.

아무튼 앞으로 빨리 역사학자들의 정확한 고증에 의해 김옥균의 생가지가 확실하게 밝혀져 더 이상 불필요한 '김옥균 생가지 논란'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 신상구
<필자 소개>
.천안중학교 사회과 교사(국학박사, 향토사학자・시인・칼럼니스트)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A study of Korean inflation, 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A study of shamanic culture in Taean, 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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