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송명석(영문학 박사, 무일교육연구소장)

오늘도 나는 운다. 별것도 아닌데 눈물이 곧잘 나온다. 슬픈 이야기나 드라마를 보아도 그렇고 책을 보다가도 슬픈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눈물이 솟는다.

주변에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을 보아도, 병고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인생의 밑바닥에서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보아도,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해도 맥없이 눈물이 나온다.

슬프게 우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함께 동요되어서 눈물이 나온다. 왜 그렇게 눈물이 많은지 때로는 민망할 때가 있다.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것도 큰 병이다. 눈물을 절대로 안보이려고 노력을 하지만,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글썽 고이고 눈시울을 적신다.

인생은 눈물이다. 수감번호 333번의 여동생을 떠올리려니 갑자기 눈물이 난다. 1987년 6.10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수감 중일 때 촌로인 아버님과 면회를 갔던 그 기억은 또 나를 슬프게 한다.

군 제대하고 복학하여 대학 4학년 여름 우리 가족은 한가로이 청양고추를 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골마당으로 봉고차 한대가 들어오더니 여동생을 내 동댕이치고는 무심히 달아났다. 지금도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노사분규를 주도하던 여동생은 관리직 구사대에 의해서 헌신짝 같은 운명으로 시골에 격리된 것이다. 약자의 처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가끔은 나는 비운의 주인공인, 조광조, 정약용, 김옥균, 그리고 노무현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들이 이루려는 변혁의 역사가 미완의 역사로 끝난 것에 대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곤 한다.

5.18 광주의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그 광란의 주인공들이 아직도 이 신성한 땅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고 사는 모습에 가슴 아파 운다.

정의가 실종된 사회를 살아감에도 눈물 흘리고, 아버님 산소 앞에서 당신의 삶이 얼마나 숭고했는가를 뒤 늦게 알고 통곡한다. 한 평생 안 늙을 것 같으신 어머님의 휘어진 허리를 먼발치에서 훔쳐볼 때 나는 가슴으로 도려내는 시린 아픔을 속으로 삼킨다.

‘인생은 흘린 눈물의 깊이만큼 아름답다’고 한다. 이 말은 ‘인간 고뇌의 깊이만큼의 그 눈물로 아름답게 성숙하는 게 인생이라는 뜻이다.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하고 어떻게 인생의 깊이 있는 내면의 이야기를 논할 수 있으랴.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가슴이 없어서, 매 말라서, 타인의 슬픔에 동요하지 않아서 그럴까? 그런 사람은 대개는 자기의 슬픔밖에 모른다.

인생 밑바닥까지 가 본 사람은 눈물의 의미를 실감한다. 하기야 극도의 슬픔의 한계에 도달하면 눈물은커녕 기가 막혀 멍하니 제 정신을 놓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진 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사람의 아름다운 용기와 희망을 접하면 감격의 눈물이 솟아난다.

사람은 자기가 흘린 눈물만큼 인생의 깊이를 안다고 한다. 눈물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뇌의 그 눈물을 씻어버리고, 다시 바로 시작하는 용기와 투지이다.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도전할 가치가 있다. 눈물은 인생의 ‘깊이’이며, 나는 울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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