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주우체국에서 근무중인 박남서 집배실장

‘한 분야에서 10년 종사하면 전문가, 20년 종사하면 달인, 30년은 귀신'이라는 말이 있다.
그럼 40년은 무엇으로 표현할까?

공주우체국에 40년동안 묵묵히 일 해온 사람이 있다. 바로, 집배실장 박남서씨. 박씨는 금년 2월 말일로 집배원으로 근무한지 정확히 40년이 된다.

40년 경력의 그의 삶은 어떨까? 오전 7시 20분, 그의 일과는 시작된다. 컴퓨터를 켜고, 전날 여러 사유로 인하여 발송되지 못한 등기물품을 정리하고, 밤사이 우편물이 이송된 상황을 살핀다. 그리고 차량, 이륜차의 운행 일지 등을 꼼꼼히 살핀다.

또한, 우체통의 우편물 수집상황을 점검하는 등 우편물이 수취, 배달 업무를 종합적으로 점검하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입사를 언제 하셨어요?”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1972년 2월 26일 공주우체국에 원서를 넣고, 며칠 후인 3월 1일부터”라고 대답한다. 기억력이 놀랍다.

▲ 70년대 집배원 (사진출처 우정박물관)
이날부터 그는 공주우체국 임시직 집배원으로서 근무하게 된다. 그 후 7년 만에 정식 직원으로 의당면 우체국에 발령을 받는다.

당시의 의당 우체국장은 김재중씨(작고. 의당면에서 양조장 운영)였는데, 사설 우체국이기 때문에 양조장 사장님이 우체국장을 겸했던 시절이다.

때문에 일과 후에는 심심치 않게 막걸리 파티가 벌어지곤 했다 한다. 지금이야 차량, 이륜차로 우편물을 나르지만, 그때는 우편배낭을 어깨에 메고 다닐 때고, 자전거로 운송했던 시절이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집배원의 배달 풍속도도 많이 달라졌다.

“우편물을 담는 자루를 ‘행랑’이라고 하는데, 한가득 담으면 장정 혼자서는 들기 힘들 정도로 무겁습니다. 그런 것을 서너 개씩 짐자전거에 싣고 당시 의당면 소재지인 월곡리까지 배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래도 행복하게,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시골사람들의 훈훈한 정 때문이었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로 이동할 때마다 동네 분들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따라주고, 어떤 때는 물고기를 함께 잡아 맛있게 먹었던 기억들이 아직도 나를 미소 짓게 합니다.”

의당면 수촌리에 살림을 차리고, 3남 1녀를 키워 이제는 모두 장성하여 각자 맡은 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감사하고, 보람을 느낀다는 박남서 집배실장.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해서 동네 어귀에서 허기를 채우기도 하고, 때론 동네에 큰일이 있을 때는 거기서 점심을 대접받기도 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빗겨간다는 박씨는 “도시락을 날라주던 꼬마 둘째 딸은 벌써 훌쩍 커서 아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있다”며 미소를 짓는다.

문득 기자도 초등학교 3,4,학년 때 판교우체국에 근무하는 이모부께 장항선 기차를 타고 도시락을 배달해 드렸던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나서 덩달아 미소 짓게 된다.

그 옛날에는 글을 몰라 편지나 전보 등을 꼭 읽어줘야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삶의 애환이 담긴 편지를 읽어주는 집배원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던 시절이다.

지금의 마을회관격인 공회당에서 소위 '양학'(한글을 일컬음)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었지만, 까막눈이 적잖이 많았던 터라 집배원들이 편지도 읽어주고, 겉봉투도 써주곤 했다.

박씨는 40년 동안 공주관내를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눈감고도 공주전역의 골목골목을 찾을 수 있고, 대략적인 주민들의 이름도 외울 정도다.

오랜 집배원생활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개한테 물린 상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실장 역시도 “장딴지 등에 여러 군데 영광(?)의 상처가 있다”면서 옛날 집배원들의 고충을 털어 놨다.

▲ 박남서 집배실장이 그의 분신과도 같은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집배원 생활에 만족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씨는 “애초, 교도소 교정직을 시험을 보려고 했는데 당숙 아저씨가 만류하는 바람에 집배원으로 지원하게 돼 좋은 직장을 갖게 되어 만족 한다”고 말한다.

40년 동안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 온 그의 삶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열심히 고생하고 있는데 제가 50명의 근무평점을 주어야 하니 그것이 가장 곤란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의 말에서는 직원들을 사랑하는 그윽한 마음의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꿈의 교회 장로답다.

"행복을 드리는 우편물류과 박남서입니다." 고객의 전화를 기운차게 받는 박남서 실장. 그의 삶에 깊은 존경과 함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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