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임금 무덤의 내부 구조는 단칸 벽돌무덤방 형식이다. 이 구조는 덧널[곽] 형식 다음에 나타난 제도이다. 방[실] 형식이 처음 나타난 것은 초 나라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 형식은 후장과 관련하여 외부 세계와 통하는 장치를 의미한다. 바깥 세계와 단절된 세계에서 소통하는 세계로 이행하는 데는 제사와 매장 공간의 확보라고 할 수 있다.
무령임금 내외의 벽돌무덤방은 크게 연도[널길과 무덤문(현문)]와 무덤방[현실]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시설로는 무덤길[묘도]와 배수구가 있다. 땅 위의 건축 형식을 모방한 것이라 하겠다.
〇 무덤문[현문]의 존재
그런데 무덤 입구[남쪽]에서 연도[길이 2.9m, 너비 1.04m, 높이 1.45m]의 1/3 부근의 천정에 3개의 벽돌이 삐어져 나와 있다.
이 장치가 무덤문[현문]의 흔적이고 이는 공양을 올리는 의례 공간의 경계선임을 알려주는 표시라고 보았다.
무령임금 무덤의 연도 널길상의 문은 5호무덤[분]이나 6호무덤[분]과 구분되는 장치이다. 특히 6호무덤[분]은 무덤문[현문]이 설치될 부분이 한 칸 넓게 벽돌을 쌓아서 처리하고 있다. 이와 비교하여 5호무덤[분]도 역시 같은 비율의 지점에 구별이 쉽다.
5호무덤[왼쪽]은 무령임금 무덤방 연도와 같이 처음과 마지막이 같지만 6호무덤[분]은 연도의 중간 부분이 한 칸 내어 쌓기를 하였다. 5호무덤의 가운데 흰 색의 것은 머리를 다치지 않도록 싸놓은 것이다. 이 그림은 모형관의 것이다.
무령임금 무덤과 6호무덤[분]은 연도상에 있어서 구별되는 것을 알 수 있다.6호무덤의 연도가 외형상 한 칸 내어 쌓기를 하는 대신, 무령임금 무덤의 그것은 천정에 그러한 장치를 한 것이다.
그 장치가 바로 천정의 3장 벽돌이 삐어져 내려와 있다는 것이다.
위의 도면은 서쪽 벽이고 아래 도면은 동쪽 벽이다. 중간 맞닿은 곳이 천정 부분이다. 연도 1/3 지점이 벽돌이 3개가 나와 있다.
위의 그림은 안승주가 도안한 것인데, 동쪽 벽과 서쪽 벽을 서로 연결한 것이다. 원래는 천정이 표현되지 않고 동·서벽만으로 도안된 것이었다.
이 지점은 김원룡이 1973년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목문’[나무 사립문]이 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 위치이다.
석수[일각수]의 뒤 현실[무덤방] 쪽으로는 목판 조각들이 떨어져 있는데 서벽에 가까운 목판은 흑칠을 했고 표면에 백색으로 둥근 테같은 것이 그려 있고 그 목판 동쪽에는 끝에 동[구리]테가 끼워진 깃대 같은 것의 잔결[부스러기]이 떨어져 있다.
그리고 석수[일각수]의 좌우 쪽 벽 가까이 못들이 있고 목판위에, 또 서벽 가까이에 각각 동환[구리 고리] 잔결[부스러기]이 남아 있다.
이 목판들은 뭣인지 알 수 없으나 목판 방향들이 제멋대로여서 처음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고 넘어지거나 떨어져서 그리 흩어진 것이라고 믿어진다.
이 경우 연도[널길]와 현실[무덤방] 사이 즉 연도의 북단, 현실의 입구에 간단한 목문[나무문]을 만들어 끼워 두었던 것이 썩어서 넘어진 것이 아닌가도 생각되나 확실치 않다.
현실 입구에 간단한 목문[나무문]을 해달았던 흔적은 고구려의 무용총, 각저총에서도 볼 수 있었고 신라의 노서리의 소위 마총[말무덤]에서도 볼 수 있었다[《보고서》[1973:13] .
김원룡은 1973년 발굴보고서에서부터 1991년《백제무령왕릉》까지 일관되게 ‘나무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1973년의 ‘목문’에서 1991년의 ‘목비’로 바뀌었을 뿐이다.
장의관들은 벽감의 등잔에 불을 켜놓고 이제 연도 쪽으로 나가 현실 입구에는 목비[나무사립문]같은 것을 세워서 막았을 가능성이 있다. 연도의 북단, 현실 입구쪽에 떨어져 있던 목편들이 그 흔적인 듯하다[김원룡, 무령왕릉의 발견과 발굴조사《백제무령왕릉》1991:107].
‘목문’에서 ‘목비’로 바뀐 것은 목문을 ‘나무 대문’으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사립문으로 해두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김원룡의 나무사립문설은 아직 추론 단계였는데, 특이한 형식의 벽돌[전돌]에 착안하여 나무문을 복원해 본 것이 윤태영의 논문이다.
벽돌[전돌] 3장은 너비가 대략 13cm 안팎으로 대문 양쪽을 가로지른 ‘문액[출입문 편액]의 두공’이라는 견해이다. 이 튀어나온 벽돌[전돌]에 관한 것은 그동안 a 주술적이다 b 잘못된 것이다 c 고의적인 것이다 등의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주술적이라는 견해는 김원룡[1973]이, 벽돌[전돌]을 쌓는 과정에서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는 안승주[1975]가, 고의적인 것이라는 견해는 윤무병[1991]이 각각 제시한 것이다.
천정부 입구 가까이 전[벽돌]을 2매 천정에서 남북 방향[작은모]으로 꽂아내려 잘못하면 이마를 받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나 만약 전[벽돌]이 저절로 삐져나온 것이 아니고 고의적인 것이라고 하면 울릉도의 나말여초의 석총의 입구 천정부에도 같은 방법으로 돌을 뾰죽하게 내밀게 하는 것이 상기되며 무슨 주술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보고서 1973:9].
남벽 중앙에 부설된 연도는 장[길이] 2.9m, 폭[너비] 1.04m, 고[높이] 1.54m로 구조형태는 현실을 축소한 것과 같다. 축조 방식도 현실과 동일하며 전에 시문된 연화문도 양식별로 구분해 보면 똑 같다. 그리고 연도 천정 중앙 가까이에 단변적[작은 변의 쌓음]으로 쌓은 전 3매가 6~8cm 가량 빠져 있는데 이것을 주술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송산리 6호분의 경우 그와 같이 빠져 나온 전이 없는 것을 본다면, 주술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적전[벽돌을 쌓는 것]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안승주 백제고분연구《백제문화》제7·8합집 1975:107].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천정부 입구 가까이에 천정에서 남북으로 꽂혀 있는 2매의 전[벽돌]의 존재이다. 이들 2매의 전은 잘못하면, 이마를 받치게끔 되어 있는데 적전[벽돌 쌓기]의 잘못으로 인한 것인지, 어떤 주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울릉도의 나말 여초의 석총의 입구 천정부와 통하고 있어 고의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윤무병 무령왕릉의 구조와 묘제《백제무령왕릉》19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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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널길[연도] 천장의 튀어나온 벽돌[전돌] 3개[보고서에는 2개]에 대한 의문은 윤태영[2005]에 의하여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원룡과 윤무병이 제기한 ‘주술적’이며 ‘고의적’인 것에 대한 의문은 풀지 못했다.
김원룡이 주술적이라는 근거는 울릉도 북면 현포면 제16호분에 있었다[국립박물관 조사보고(1963) 제4책 《울릉도》24쪽, 북면 현포동 지구 제16호분]. 이 돌덧널무덤[석곽분]은 울릉도 특유의 어형 평면이며 최대폭 2.1m 천정폭 2.1, 최대고 1.4m, 전형적인 ‘축약미’를 가지고 있다.
천정석은 전부 16개의 돌인데 맨 처음 돌 다음에 ‘격석’[사잇돌]이 내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령 임금무덤의 널길[연도]에서 무덤방[현실] 쪽으로 1/3 지점의 나무사립문과 울릉도 북면 현포면 제16호무덤[분] 처음 돌과 다음 돌 사이에 돌이 내려져 진 것은 모두 같은 기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〇 공헌 장치들[악기와 제기]
아는 것처럼, 무령임금 부부는 모두 28개월 상례[장례 포함]를 지냈다. 졸곡이 끝나고 흉례가 아닌, 길례[5례의 하나로 가례, 흉례, 군례, 빈례 등이 있다. 길례는 규모로 대사·중사·소사와 관련된 것이나 혼례 등 경사와 관련된다.
그 원형이 중국의 경전인 《주례》에 있으나, 한나라에서 진晉나라를 거쳐 당나라에 이르러 크게 강조되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왕조에서는 5례가 국정 운영의 기본 틀이었다고 할 수 있다.]로 치러졌다.
3국시대에 5례가 시행되었다는 흔적은《삼국사기》에서 산천 등에 지내는 제사가 대·중·소로 나눈 것으로 확인된다. 이런 내용은 당 나라 ‘개원례’에 체계를 갖추어 제시된다.
김원룡은 ‘무령왕릉의 발견과 발굴조사’[《백제무령왕릉》1991:95~110]에서 이러한 길례의 존재를 제시하고 있다. 임금과 비[아내]의 관대[목관이 놓인 대] 앞 일부 낮아진 부분에 ‘작은 목안[나무 소반]’과 ‘제탁[제사상 차림을 놓을 탁자]’가 있었고 임금의 경우 그 남쪽에 ‘현금[거문고]’이 있었다는 보고이다.
왕관[임금의 목관]이 관대[관을 놓은 대]위에 안치된 뒤 관대 앞에 일단 낮아진 부분에는 관 쪽에 동잔[구리잔] 2개와 동저[구리 젓가락] 1 벌 그리고 청자4이주병[귀가 4개 달린 청자 술병]을 아마 작은 목안[나무 소반] 위에 놓고 그 남쪽에 은제 마구리 장식의 현금[거문고], 그 옆에 철모[쇠로 만든 칼촉?] 2 자루를 놓았던 모양이다[김원룡, 무령왕릉의 발견과 발굴조사《백제무령왕릉》1991:107].
왕비관[임금 비의 목관]이 왕관[임금의 목관] 서측에 역시 남침으로 놓여진 다음 관대[관을 놓는 대] 앞에는 조그만 제탁[제사상 차림을 놓는 탁자]이 놓였을 것으로 생각되나 거기에는 동잔[구리잔]만 2개 놓였던 모양이고 왕[임금]쪽의 주병[술병]은 없었다[김원룡, 무령왕릉의 발견과 발굴조사《백제무령왕릉》1991:110].
김원룡은 임금과 비[아내]의 목관이 안치된 관대[목관을 놓는 대] 앞에 각각 ‘작은 목안[나무 소반]’과 ‘제탁[제사상 차림을 놓는 탁자]’이 놓여 있었다고 추측하였다.
임금과 비[아내]의 ‘작은 목안’과 ‘제탁’은 ‘일단 낮아진 부분’에 각각 놓여 있었다. ‘작은 목안’ 위에는 목관 쪽에 동잔 2개와 동저 1벌 그리고 청자4이주병이 놓여 있었고 ‘제탁’ 위에는 동잔 2개만 있었고 술병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례는《예기》‘상대기’에서도 확인된다.
담제는 상을 벗는 것인데 이를 행하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중략...담제를 지낸 후에는 부인과 동침할 수 있다. 담제를 지낸 뒤 같은 달에 길제의 절기를 만나면 길제를 지낸다. 그 뒤에는 평소의 연침[잠자리]으로 돌아가고 빈소에서 자지 않는다. 만일 4시의 길제에 해당되지 않으면 달을 넘겨 길제를 지내고 기다렸다가 연침에 돌아간다[권오순 《예기》‘상대기’ 1996:479 ~ 480].
상을 벗는 의례에는 음악을 연주할 수 있고 그 뒤에는 부부간의 잠자리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원룡이 ‘은제 마구리 장식의 현금[거문고]’를 제기한 것도 이러한 차원이 아닌가 여겨진다.
김원룡이 거문고라고 주장하는 데는 은으로 만든 6각형과 장방형 얇은 판 장식[꾸밈]에 근거한다. 이 물건들은 원래 거문고의 장식인데 나무 등은 썪었고 남은 형태라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육각형 은장식은 그 안에 목질이 아직 남아 있고 그 형태가 금[거문고]의 측면과 같고 또 두 개가 동서로 약 1.3m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것은 아마 현금이 동서로 놓여 ...중략... 현상처럼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김원룡, 무령왕릉의 발견과 발굴조사《백제무령왕릉》1991:107].널길에서 무덤방으로 들어가서 바로 동쪽 목관[임금]의 받침대 앞 무덤방 문 가까이서 검은 칠을 한 은으로 만든 물건[흑칠은금구]이 발견되었다. 검은 칠을 한 은판은 다음과 같이 세 종류가 있다.
6각형: 길이 18.4cm, 높이 10.9cm, 두께 1.8cm
장방형: 길이 20.9cm, 너비 5.3cm, 두께 1.8cm
대[띠]형: 나타난 길이 59cm, 너비 5.8cm, 두께 1.8cm
이 엷은 종이와 같은 은판을 접어서 만들었고 표면에는 전체 면에 흑칠이 씌워 있다.
또한 모든 등 면에는 터 있고 그 안에 나무를 박았고 나무는 은판 밖으로부터 박은 쇠못[철병]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쇠못의 숫자는 6각형에서는 2열로 10개, 장방형은 5개[그러나 3개는 쇠못의 머리뿐이고 뿌리가 없는 꾸밈용], 대형의 긴 것은 현존 9개이다.
이 등 면, 나무가 박힌 면은 은판을 3~4mm씩 안으로 접혀 있다. 이 물건들은 모두 완만한 활모양의 면을 가지고 있어서 ‘거문고의 꾸밈’이라는 것이다.
즉 두 개의 6각형 꾸밈은 목관을 받쳐 놓는 대 앞에서 동서로 1.2m의 간격을 두고 놓여 있으며 그 장식은 바닥에 들린 6각형으로 나무 거문고의 마구리에 꼭 알맞다고 본 것이다.
용기[담는 그릇]의 장식 같지는 않고 모두 경미한 만곡면[활모양의 완만한 면]을 가지고 있고 금[거문고]의 장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두 개의 6각형 장식은 관대[임금 목관 받침대] 앞에서 동서로 1.2m의 간격을 두고 놓여 있으며 그 장식은 바닥에 들린 6각형으로 목금[나무 거문고]의 마구리에 꼭 알맞다[보고서].
이 거문고의 마구리는《악학궤범》에 등장하는 것의 길이가 5자1푼이고 너비가 6치9푼인데다가 은으로 만든 꾸밈의 크기와도 대강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악학궤범》의 거문고. 위[앞면] 아래[뒷면]
김원룡은 거문고가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더 있었다고 보았다. 널길[연도]의 북쪽 즉 무덤방[현실]의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가운데가 꺾어진 모양의 장방형 꾸밈도 또 하나의 현악기 장식이다.
6각형 꾸밈은 임금 부인의 다리 부분 북부에서도 1개 나오고 긴 대형 장식이 임금 다리 부분 쪽으로 뻗어 있어 또 하나의 6각형 장식이 없기는 하나 이것 역시 결국 현실에는 남북에 각각 1 개씩의 거문고가 놓였고 널길[연도]에는 1개의 악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소위 현금은 진晉으로 보내진 7현금을 고구려에서 개량한 것인데 현금의 크기는 이조[조선]시대의《악학궤범》에 의하면 장[길이] 5척1분에 폭[너비] 6촌9분이어서 여기 은장식의 크기와 대강 들어맞는다. 그리고 연도의 북단 즉 현실의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가운데가 꺾어진 형[모양]의 장방형 장식은 또 하나의 현악기 장식이라고 생각되고 6각형 장식은 왕비의 족부 북부에서도 1개 나오고 긴 대형 장식이 왕족부[임금 다리 부분] 쪽으로 뻗어 있어 또 하나의 6각형 장식이 없기는 하나 이것 역시 결국 현실에는 남북에 각각 1 개씩의 현금이 놓였고 연도에는 1개의 악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원룡은 도합 4개의 현금을 비롯한 악기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김원룡의 이러한 현금[거문고] 꾸밈은 차차 목관의 장식으로 보는 경향이 짙어졌다.
졸속으로 무덤을 발굴하여 유물의 정확한 위치와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영원한 숙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 풍속을 연구함으로써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하여튼 현금은 오래된 악기로《삼국사기》[권32 잡지 제1 악]에도 등장한다.《예기》에 의하면, 5현의 거문고는 순 임금이 만들어 남풍의 시를 노래하였다. 그 전악의 관인 기[사람 이름 순 임금을 섬겨 음악을 다스렸다고 함]는 남풍의 악을 제정하여 이로 제후 중 공덕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었고 이 곡을 연주하여 춤추게 하였다.
악이란 베푸는 것 즉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예란 보답하는 것 즉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다. 악은 그 노래하는 바 공덕에 의하여 생기는 것을 즐기고 예는 그 생물이 유래하여 시작하는 곳 곧 조상을 공경하는 것이다. 또 악은 마음의 덕을 나타내며 예는 사람의 정에 보답하고 조상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기식 음악과 예의 관계이다.
무령임금 내외의 무덤이 벽돌방으로 꾸며진 것은 공양을 올리기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하여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문화는 무령임금 시대의 백제 특유의 무덤문화라 할 수 있다. 28개월 상례나 수많은 껴묻거리[부장품]는 분명하게 ‘후장’ 풍속이다.
그러나 무덤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소위 ‘불수불봉’[무덤에 나무를 심지 않고 봉분을 만들지 않는다]의 형식은 ‘박장’의 풍속이다. 이러한 상례 제도는 당시 중국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형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