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 기자의 마카오 답사기-2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세나드 광장. 유럽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광장의 바닥은 포르투갈에서 직접 공수해 왔다는 물결모양의 모자이크타일로 장식돼 있다. 마카오는 이 디자인을 도심 곳곳에 적용해 통일감을 주고 있다. 공주의 공공디자인은?

마카오에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야 한다. ‘마카오’에서는 ‘막가지 마오’다. 그만큼 곳곳에 숨어있는 문화유적이 많다는 것. 이것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주 천천히 다니며 감상해야 한다.

돌 하나, 벽돌 하나, 문양 하나하나에서 오랜 세월의 무게감이 녹아 있다. 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듯하다.

이처럼 마카오는 450여 년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받아들인 문화를 잘도 간직하고 있었다.

공주는 구석기 시대부터 백제의 왕도, 고려, 조선, 일제시대,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도시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를 입증할 증거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마카오의 거리를 걸으면서 왠지 공주가 서글펐다. 지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만이라도 잘 보존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마카오에는 성 바울성당, 성 안토니오 성당, 펜하 성당, 성 로렌스 성당, 성 요셉 신학교와 교회, 성 아구스틴 광장, 성 아구스틴 교회, 대성당, 성 도미니크교회, 신교도 묘지, 나차 사원, 삼카이브군 사원, 아마사원 등 등록된 세계문화유산의 절반가량이 종교와 관련이 있다.

▲ 마카오의 중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아마사원. 1488년 바다의 수호신인 천후를 모시기 위한 것으로 천후는 수호신인 아마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을 당시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 성당과 사원들을 보면서 공주를 생각했다. 공주에는 가장 잔인한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었던 황새바위가 있다. 당시 고문으로 인해 흘린 피가 제민천으로 흘러 금강을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동학혁명의 최후 격전지였던 우금치가 있다.

▲ 성 바로오성당. 선교활동을 하던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설계되고, 1937년 종교박해를 피해 나가사키로부터 온 일본인들에 의해 건축됐다. 설립당시 아시아 최대규모의 성당이었으나, 세차례의 화재로 지금은 정면 벽과 계단만 남아 있다.

아울러 공주제일감리교회, 꿈의 교회 등 100년이 넘은 교회가 있다. 백령도에는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가 있다. 중화동 교회다. 1897년 충청도 공주사람 김성진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으려고 조정에 충언을 상소하다 백령도에 유배됐다.

김성진은 이곳에서 한자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믿게 됐고, 동네 유지인 허득에게 성경 한권을 주어 믿음을 전파한 뒤 함께 힘을 합하여 1898년 중화동 교회를 세웠다. 남한 최초의 교회를 세운 인물이 ‘김성진’이라는 사람이다.

천년의 고찰들도 있다. 무속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공주는 이러한 종교적인 자원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공주의 관광자원인데, 이러한 자원들이 그냥 한숨만 쉬고 있다.

특히 황새바위는 황새바위가 지닌 역사적 의미만큼의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황새바위를 제대로 된 성지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공산성에서 무령왕릉까지의 동선이 확보되며, 관광객들의 도보이동을 유도할 수 있게 된다. 공주는 종교마케팅의 적지이다.

▲ 기상상황을 알려주는 기구들. 태풍, 풍향 등을 알려주는데 사용됐다.
▲ 기아등대와 예배당. 기아등대는 1856년 지어진 중국 최초의 등대로 현재까지 마카오주변을 항해하는 배들의 나침반역할을 하고 있다.예배당은 1622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아마사원을 찾은 관광객이 향불을 피우며 소원을 빌고 있다.

  

▲ 성 로렌스성당의 내부. 성 로렌스 성당은 마카오에서 가장 화려한 교회로 알려져 있다. 교회 내부의 돔에는 빛이 들어와 제단앞에 서면 신성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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