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 기자의 포토 플러스(+) 이야기

▲ 행사가 끝난 후 군악대용 외투를 입고 찍은 사진. 사진 맨 오른쪽이 기자, 옆의 런닝맨(?)은 기자의 동기다.

기자는 대학 3학년을 마치고 휴학했다. 군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장이 나오지 않아 공군에도 지원했다. 그리고 육군 기술병에 지원하기 위해 운전면허도 취득했다. 그러던 중 6월 25일자 입대 영장을 받았고, 전역하지 얼마 되지 않은 선배를 만났다.

선배와 차를 한잔 하면서 “춘천으로 집결통보를 받았다”라고 말하니 “너는 이제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쪽은 1군사령부 예하지역인데 최후방이 원주이고 양구, 인제, 원통 등 전방부대로 배치돼 철책선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

▲ 원주시내에서 거리행진을 하고 있는 모습.
전방경계훈련의 악몽(?)이 떠올랐다.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질 않자 1학년 때는 훈련소에 입소교육을 시켰다.그리고 2학년 때는 전방부대에 배치시켜 현역병과 함께 근무를 시켰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체험해 보라는 의도였다.

그리고 학년별 일주일씩 군부대에서 고생한 보상으로 실제 군복무기간 중 45일씩 총 90일을 단축시켜 줬다.

2학년 때 기자가 전방경계훈련을 받은 곳은 철원에 있는 백골부대였다. 대성산이 보이는 곳이었는데 참으로 추웠다.

3월에 갔는데도 어찌 그리 추운지 스키파커를 입고 근무를 서는 대도 꽤나 추웠다.

그런데 그곳 현역병들은 얼음을 깨고, 냉수마찰을 하며 구보를 하고 있었다.

그곳의 병사들을 보니 모두가 얼굴이 검었다. ‘시골에서 왔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출신지를 물으니 ‘서울출신’이라는 것이다. 아찔했다. 그들의 얼굴이 시커먼 이유를 알게 된 것. 얼굴에 동상이 걸린 것이었다.

그런 기억들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기자는 보충대에서 선발하는 군악특기병 모집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교 관악부 시절 맞을 만큼 맞았기 때문이다. 그냥 차라리 군악대에서 맞기로 결정했다.

집결지인 춘천 102보충대에서 1군사령부 군악대에 뽑혔다. 그러나 군사령부에는 훈련소가 없어 같은 원주에 있는 36사단에서 위탁교육을 시켰는데 36사단에서도 군악병을 뽑고 있었다.

거기서도 오디션을 봤고, 36사단 군악대에서는 기자가 이미 1군사령부 군악대에 선발된 것을 알고 무척 아쉬워했다.

훈련이 끝날 즈음에 군악대 내무반장이 훈련소에 기자를 찾아 왔다. “네가 36사단 군악대에 남게 됐다”는 것이었다. 뜻밖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36사단 군악대에서는 ‘경음악조’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경음악조에서 일명 ‘오부리(즉석연주)’를 할 수 있는 병사가 없어 군악대장이 군 간부들에게 매일 깨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 36사단 경음악조. 사진의 맨 왼쪽 베이스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 기자.

‘오부리’는 결코 쉽지 않다. 최소한 수 백곡은 꿰고 있어야 가능하고, 노래마다 키(조)가 달라 이를 다 외우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키(key)를 다르게 반주를 해줘야 한다. 그러니 악보에 의존하는 병사들로는 ‘오부리’가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명 ‘오부리’가 가능한 기자를 36사단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부관부에서 1군사령부로 전출명령을 내지 않아 기자는 36사단 군악대에서 근무하게 됐다.

이곳에서 새파랗게 젊은 날의 그리운, 그러나 다시 또 체험하고 싶지는 않은 많은 추억들이 주렁주렁 열리게 된다.

 

▲ 원주 치악체육관에서 어린이들을 위해 군악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장면. 사진의 중앙에 심벌즈를 들고 있는 것이 기자.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