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대리로 이전하기 전 중장유치원이 있던 곳.

70년대 초 나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유치원에 다녔다. 당시 사립유치원에 다닌 셈인데 유치원에 다니면서 별도의 비용을 냈던 기억은 없다. 복 받은 인생이다.

당시에는 왜 그리도 코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찔찔 흘린 코를 소매로 슥 닦지 말고, 손수건으로 닦으라고 손수건을 옷핀에 꽂아 매일 웃옷에 달아주는 것이 당시 어머니들의 일과였다.

당시 중장유치원은 지금의 중장초등학교 아래에 있었다. 이곳에는 장난감도 많았지만, 정작 우리가 가지고 놀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당시 방안에는 장난감 자동차가 있었는데 올라타고 발로 구르면 앞으로 가고, 핸들도 조작할 수 있었다. 정말 그 장난감 자동차를 타보고 싶었는데 끝내 타보지 못했다.

당시의 나의 유치원 담임선생님은 대표자의 딸인 이미자 선생님이었다. 당시 이미자 선생님은 딱딱한 검정표지로 만든 출석부를 가지고 원생들의 출석을 불렀고, 출석을 부르고 있는데 말 안 듣고 떠들거나 하는 녀석이 있으면, 그 녀석을 불러 출석부로 머리를 때렸다. 물론 나도 몇 번 맞았던 기억이 난다.

유치원에 다니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당시 유치원에서는 원생들에게 점심을 제공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무료급식을 시행했던 것. 어떤 때는 단팥빵을, 어떤 때는 국밥을, 어떤 때는 옥수수 빵을 주었다.

그러나 그 것들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기도를 해야 했다.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라고. 기독교 재단에서 유치원을 운영했고, 목사님이 대표로 계셔서 이 절차가 필요했던 것.

▲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농바위

그러다가 용지재건중학교가 중장유치원자리에 자리를 잡게 됐다. 당시만 해도 돈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많았고, 이 학교는 이러한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됐다.

이 바람에 중장유치원은 농바위 옆 기와집으로 이사했다. 농바위 옆 중장유치원에는 미끄럼틀이 있었는데 그 위에 올라가면 간혹 갑사 쪽으로 가시는 스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원생들은 미끄럼틀에 올라가 “중~중~ 까까중~ 얼마주고 깎았냐?”라고 하면서 큰소리로 놀렸다. 지금생각하면 참으로 못된 행동인데 그때 당시에는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못했다.

그래도 쫓아와서 혼내주는 스님은 한 분도 안계셨다. 아마도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제자라서 그런 것 같다.

이후 이 유치원은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로 이전했다. 세월이 흘러 이젠 원장도 바뀌고, 명칭도 바뀌었지만, 아직까지도 오랜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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