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폐이발소'에서의 황당함이란

길을 가다가 만난 이용원.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이발소’라는 말이 더 친숙한 곳이다. 난 허수룩해 보이는 이발소가 더욱 편하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옛날의 이발소엔 정겨움이 있었다. 면도날을 갈기 위한 가죽 벨트와 가죽 벨트와 함께 붙은 광목천이 있었다. 이발사 아저씨는 면도칼을 그것들을 이용해서 갈고는 했으며, 간혹 잘못하면 면도날을 갈기 위한 가죽이 면도칼에 베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숫비누와 빨래비누를 반씩 쪼개 넣어 거품을 만들어 내는 도구로 쓰이는 플라스틱 통이 있었고, 이발사는 양쪽을 번갈아가며 솔질을 해서 거품을 만들어 냈다.

또한 겨울이면 연탄난로를 피워 다목적으로 이용했다. 더운 물을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철사로 연통과 연결해 수건을 말리는데 사용했으며, 손님들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도록 거품용 솔을 연탄난로에 문질러서 적당히 데워 면도를하는데 사용했다.

키가 작은 어린이들은 의자위에 널빤지를 깔고 그 위에 앉혀서 머리를 깎아 주었으며, 학생들은 주로 상고머리로 깎았다.

간혹 잘 들지 않는 이발 기계에 걸리게 되면 머리가 잘리지 않고 씹혀 인상을 박박 쓰며 참아야 하기도 했다. 당시엔 기계 충에 걸려 머리가 둥그렇게 파인 학생들도 있었다. 그런 애들에겐 이발사가 분가루를 발라주기도 했다.

이발소의 전면에는 거울로 되어 있었지만, 한쪽 벽면에는 ‘혁명공약’, ‘이용업 허가증’, ‘협정가격표’등도 걸려 있었다.

그리고 이발소에는 신문이 있어 동네 어른들은 신문을 보기 위해 머리를 깎지 않아도 오는 분이 계셨고, 그 신문은 사각형으로 조그맣게 잘라 면도한 찌꺼기를 처리하는데 사용됐다. 그런데 그 신문지는 머리를 깎는 사람의 어깨위에 놓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발소의 의자는 면도의 편의를 위해 뒤로 고개가 젖혀지도록 돼 있었지만, 애들에게는 의자를 뒤로 접어볼 기회가 없었다.

커서 멋모르고 아무 이발소에나 갔다가 두 번 놀랐다. 대학에 다닐 때였다. 한번은 대전 시민회관 앞에 있는 길가의 이발소에 머리를 깎으러 갔었는데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이 나의 무릎에 걸터앉는 바람에 기겁을 했다.

순간 “아, 내가 여기를 잘못 들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버스 시간 핑계를 댔다. “시간이 없으니 머리만 빨리 깎아 달라”고. 그래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두 번째 위기는 수원에서 만났다. 이용원 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 조명이 어두컴컴한데다가 슬립을 입은 50대 여성이 맞이하는 것이었다.

내가 첫 손님일 것 같아 그냥 나가면 소금뿌릴 것 같아 그냥 들어갔더니 추리닝을 주면서 나보고 “옷을 갈아 입으라”고 권한다.

내가 “머리를 깎으러 왔는데 왜 옷을 갈아입으라고 하느냐?”며 물으니, “쉬러 온 것 아니냐?”며 자꾸 옷을 갈아입을 것을 권했다. 나는 끝까지 “쉴 겨를 없으니 머리만 깎아 달라”고 했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가 앉은 의자를 룸으로 밀고 가 이발사를 불러 머리를 깎아 주었다.

그리곤 로션을 얼굴에 발라 주더니 이발료를 2만 5,000원을 받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집이 소위 '퇴폐이발소'였다. 나는 그 집이 별로 였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내가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 후로는 밖에서 안이 보이는 이발소만 찾아 다녀 슬립을 입은 아줌마가 맞이하는 이발소에 멋모르고 가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은 집에서 대충 해결한다. 그래도 별로 표시가 안 난다. 머리숱이 적으니 좋은 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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