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8년(1418년) 8월 8일, 태종은 충녕대군 이도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그러나 8월 9일과 8월 10일 아침까지 전위를 거두어달라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태종은 그들의 요구를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0일, 태종은 세자 이도에게 몸소 충천각모를 씌워준 다음, “임금의 의장儀仗을 갖추고 경복궁에 가서 즉위식을 거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도는 충천각모를 쓴 채로 여러 신료들 앞에 나와 말했다.

“내가 어리고 어리석어 큰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우므로, 지성으로 사양하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윤허를 받지 못하고, 부득이하여 경복궁으로 돌아간다.”

신료들은 이도가 충천각모를 쓴 것을 보자마자 곡성哭聲을 멈추고, 혹은 꿇어앉고, 혹은 땅에 엎드려 서로 돌아보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도가 임금을 상징하는 홍양산을 받쳐 쓰고 경복궁에 도착하니 좌의정 박은이 나서서 “세자는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 굳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이미 상위上位의 모자를 쓰셨으니, 더 이상 전위를 거두어달라는 청을 드릴 수 없다”라고 말했다.

박은의 말에 모든 신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날 경복궁 근정전에서 이도(이하 세종)의 즉위식이 거행되었으니, 그가 곧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이다.

태종이 세자 책봉 2달 만에 왕위를 세종에게 전격적으로 물려준 이유

세종은 세자로 책봉된 지, 약 2달 만에 왕위에 올랐다. 14년 동안 세자 자리를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군왕이 되지 못한 양녕대군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태종(이하 상왕)의 전위는 파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권력욕이 많았던 상왕이 세종에게 왕위를 전격적으로 물려준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겉으로 내세운 전위의 명분은 풍병風病과 자연재해自然災害였다.

그러나 ‘그는 상왕이 된 이후에도 사냥을 즐겨 다녔다’는 ≪실록≫의 기록을 보면, ‘풍병 때문에 전위를 결심했다’는 그의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자연재해 역시 자연계의 현상일 뿐, 임금이 개인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조선 초기에는 자연재해를 군왕의 덕목과 연관 지어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훗날 장영실을 비롯한 여러 과학기술자들이 천문관측기기 및 각종 시계(해시계, 물시계)의 제작을 통해 우주의 운행이치와 시간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재해는 자연계의 순환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보편적인 현상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필자는 다른 측면에서 태종의 전격적인 전위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상왕은 양녕대군을 제치고 세자 자리에 오른 세종의 불안한 정치적 위치와 취약한 정치적 명분을 일찍이 잠재우기 위해서 전위를 서두른 것 같다.

사실 세종에게는 추종자들이 많지 않았고, 동생이 형의 세자 자리를 빼앗았다는 세간의 비판적 여론에 휘말릴 수 있는 개연성이 무척 컸다. 궁궐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폐 세자 사건의 내막과 진실을 잘 알 수 있었지만, 민심의 기반이 되는 일반 백성들의 눈과 귀에는 세종이 상왕처럼 아버지와 둘째 형의 권좌를 빼앗은 파렴치범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왕은 세종이 자신의 후계자임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세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쇄신시키고, 세종의 신하를 한 사람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어줄 생각에서 전위를 서두른 것이 아닌가 싶다.

둘째로 상왕은 세종을 세자 자리에 앉혀놓고 제왕학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인턴 임금의 신분으로 냉엄한 현실정치를 직접 체험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그것은 비록 세종이 학구파였다고 하더라도 현실정치는 책갈피 속의 정치이론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왕이 세종에게 왕위를 선뜻 물려준 데는 세종의 지적 교양수준과 분별력을 신뢰하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상왕은 자신의 유고有故시, 폐 세자의 추종세력이 세종의 취약한 정치적 명분을 역이용해서 세자 복위를 꿈꾸거나 왕위 찬탈을 위한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상왕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도 “주상이 장년이 될 때까지 오직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만은 내가 친히 청단聽斷하겠다”고 밝힌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에 대한 일단의 근거를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략>...“내가 전위한 것은 본시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한가롭게 지내고자 함에서이다. 유독 군사관계만은 아직도 내가 거느리고 있는 것은, 주상(세종을 지칭)은 나이 젊어 군무를 모르기 때문이나, 나이 30이 되어 일에 대한 경험이 많아지면, 다 맡길 생각이다. 지난날 만약 여러 아들로 원수元帥를 삼아 각도 병마를 갈라 맡고 장사將士들을 접견하게 했다면, 주상이 어찌 지금까지 군무를 모르겠느냐. 그러나 내가 감히 못한 것은 저런 험상한 위인(양녕대군을 지칭)이 동궁에 있는데, 여러 아우들이 각기 병권을 잡는다면, 어떻게 서로 용납될 수 있겠느냐.”...<중략>...』

◇ 출처 : 세종실록 1년(1419년)/2월/3일

1418년 8월 11일, 세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담은 즉위교서를 발표했다. 그 골자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나는 학문이 얕고 거칠며, 나이가 어린 바람에 일을 하는데 있어서 경륜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국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독단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여러 신료들과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거쳐서 추진하겠다는 세종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라는 점이다. 이것은 자신의 시대엔 정치적 보복이 없을 것이며, 급진적인 개혁 또한 추진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공식선언이다. 세종은 정권의 변동기에 흔히 발생하는 있는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킬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셋째는 ‘종사宗社의 소중함을 받들고 어짊을 베푸는 정치, 즉 시인발정施仁發政을 하겠다.’는 사실이다. 세종은 태조와 상왕이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혼돈과 무질서를 극복하고 조선을 창업하는데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을 누구보다 절감했다. 그래서 자신의 시대엔 어짊의 정치를 통해 상생의 정치를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날지 못하는 봉황鳳凰의 좌절과 개인적 비애

이처럼 세종의 정치적 비전과 포부는 거창했지만, 실제로 군왕으로서 세종의 정치적 입지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두 분(정종, 태종)의 임금이 각각 노상왕과 상왕으로 생존해 있는데다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상왕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세종은 그저 상왕의 비서에 준하는 ‘인턴 임금’일 뿐이었다. 그는 매일같이 상왕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으며, 그 자리에서 주요 국정현안을 보고했다. 그러면 상왕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세종은 그것을 신료들에게 통보하는 형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세종이 즉위한 지 약 보름이 지난 1418년 8월 25일, 상왕은 병조참판 강상인과 병조좌랑 채지지를 의금부에 하옥시키라고 지시했다. 그 다음날에는 병조판서 박습, 병조참의 이각, 병조정랑 김자온, 이안유, 양여공, 병조좌랑 송을개, 이숙복이 의금부로 끌려왔다.

강상인은 상왕의 가신家臣출신으로서 1418년 7월 8일에 병조참판으로 승진 기용된 인물이다. 상왕은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국가의 중대사와 병권兵權만큼은 직접 챙기겠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측근인 강상인과 박습(상왕의 과거시험 동기생임)을 각각 병조참판과 병조판서에 임명했다.

그런데 이들은 왕위를 물려준 이후에도 상왕이 군권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모양이다. 그래서 내심 군권을 세종에게 몰아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상왕에게 궐내의 순찰업무만 보고하고, 나머지 주요 군사문제는 세종에게만 보고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상왕은 강상인의 속내를 읽고 그를 괘씸하게 여겼다. 상왕은 이들의 배후에 또 다른 세력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병조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활동을 지시했다.

상왕은 강상인에게 괘씸죄와 조정 인사에 사사로이 개입한 잘못(자기 동생을 정 5품 무관직인 사직司直에 천거해서 임용되게 한 점)을 문제 삼아 국문鞠問할 것을 명했다. 상왕이 “단단히 고문을 하되, 죽지 않을 만큼만 하라”고 말한 것을 보면, 강상인에 대한 그의 분노가 매우 컸던 것 같다.

1418년 8월 26일, 강상인은 원종공신이라는 이유로 면죄되고 고향으로 추방되었다. 그런데 사간원과 사헌부가 계속해서 강상인의 죄를 주청하자 상왕은 1418년 9월 9일 그의 직첩과 녹권을 몰수했고, 1418년 9월 14일 그를 함경남도 단천端川의 관노官奴로 배속시켰다. 병조판서 박습을 비롯한 6인의 병조 관리들도 모두 원지에 유배되었다. 강상인 사건은 그것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1418년 9월 1일, 상왕은 세종의 장인 심온을 사은사로 임명하고, 9월 2일에는 심온에게 영수정을 제수했다. ‘국왕의 장인이니 그 존귀함이 비할 데 없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리고 9월 8일, 심온은 사은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명나라로 떠났다. 그런데 ≪실록≫은 심온이 명나라를 향해 출발했던 당시의 주변 모습을 다음과 같이 스케치 해놓고 있다.

『상왕이 환관 황도를 보내어 문 밖까지 심온을 전송하게 하고, 임금은 환관 최용을, 중궁은 환관 한호련을 각각 보내어 연서역延曙驛에서 심온을 전송하게 하였다.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되어 수상首相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

◇ 출처 : 세종즉위년(1418년)/9월/8일

그 소식을 전해들은 상왕은 새로운 권력의 핵심 축이 심온에게 옮겨가고 있음을 직시하고 그를 제거할 묘책마련에 돌입했다. 상왕의 자신의 주특기인 과거지사를 끄집어냈다.

즉 심온이 폐세자의 빗나간 언행을 다른 사람에게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기에 자신이 경고를 주었다는 점과 하륜(심온의 정적이었음)의 잘못을 자신에게 보고했다는 점을 신하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런 다음, 심온의 문제를 강상인의 사건과 연루시켜 그를 제거할 생각이었다. 상왕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심온의 동생인 심정이 병조의 관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소 심온과 사이가 나빴던 좌의정 박은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1418년 11월 3일, 상왕의 지시로 원지로 귀양 갔던 강상인, 박습, 이각, 채지지 등이 의금부로 압송되어 왔고, 열흘 뒤부터 본격적인 국문鞠問이 시작되었다. 1418년 11월 22일, 상왕은 무릎을 으깨는 압슬형을 통해 강상인으로부터 “군사는 마땅히 한곳(세종 지칭)에 모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사람이 심온이다”라는 진술을 받아냈다.

물론 강상인의 진술은 고문에 따른 것이었다. 그로부터 4일 후 강상인은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을 받았고, 병조판서 박습은 강상인의 잘못을 알고도 상왕에게 보고하지 않은 죄로 참수형을 당했다.

한편, 심온은 한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금릉을 출발해서 조선을 향하고 있었다. 1418년 11월 25일, 상왕은 전의감 판사 이욱을 의금부 특사로 파견해서 심온을 한양으로 압송하게 했다. 심온이 한양에 도착한 것은 12월 22일이었다.

강상인과의 대질신문을 요구하며 수차례에 걸친 압슬형의 고문에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던 심온은 마침내 이 모든 것이 상왕의 뜻임을 알고 쓴 웃음을 지은 채, “강상인의 말이 사실이다”라는 자백을 했다.

1418년 12월 25일, 심온은 상왕이 내린 사약을 받고 세상과 이별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상왕과 좌의정 박은이 각각 주연과 조연을 맡았던 ‘심온 죽이기’ 프로젝트는 외척의 득세를 극도로 경계했던 상왕의 광기狂氣이자 야만 그 자체였다.

이때, 세종은 상왕에게 장인 심온을 살려달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창덕궁 내전에서 아내인 소헌왕후 심씨를 부둥켜안고 통곡만 했을 뿐이다. 봉황이되, 날지 못하는 봉황의 현실적 한계와 비애를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집필자 소개> 김덕수 교수는 충북 오송에서 태어나 충북대 경제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고려대 강사, KAIST, KIST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96년에 공주대 교수로 부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공주대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책 집필, 정부기관 및 기업체 특강, 방송 출연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집필한 책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역시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던 명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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