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녕대군 이도의 세자 책봉과 왕위 등극을 다룰 때, 필자로서 가장 곤란한 것은 ‘양녕대군 이제와 효령대군 이보를 어떻게 다뤄야만 하는가?’라는 문제다.

이도를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형제들의 단점을 거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현대의 상대평가相對評價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와 궤를 같이 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장단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양녕, 효령, 충녕대군도 예외일 수 없다.

양녕대군은 호방한 기상, 풍부한 감성, 뛰어난 무예솜씨, 천재적인 두뇌, 붓글씨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그의 결정적인 단점은 급한 성격과 인내심 부족이었다. 효령대군은 착한 심성心性, 호학好學하는 자세, 문장력, 효제孝悌사상 면에서는 뛰어났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추진력이 부족했고 매사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충녕대군은 뛰어난 머리, 집념, 인내력, 호학好學하는 자세, 반듯한 처신이 장점이었지만, 고집이 셌고 운동부족과 비만이 문제였다. 이 장에서는 그들 형제간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통해 그들의 인간관계와 내면세계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다!

양녕대군(본래, ‘양녕’이란 봉호는 태종 18년인 1418년 6월 3일 폐세자로 강등되었을 때, 태종이 내려준 것임)과 충녕대군의 관계를 얘기할 때, 초미의 관심사는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깨닫고 왕위를 양보했다’는 주장의 진위여부다. 정사正史인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은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지만, 야사野史인 ≪소대기년(昭代紀年; 저자 및 연대 미상)≫과 ≪대동기문(大東奇聞; 강효석 편찬, 1926)≫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해 필자는 정사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우선, ≪실록≫이 승자의 기록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따라서 승자인 충녕대군을 과대 포장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없던 일을 창작해서 ≪실록≫에 삽입시킨 예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만약 사관史官이 자신의 견해를 덧붙일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사관은 말한다.’라고 밝히는 게 관례다.

또 필자는 목숨을 걸고 사초를 기록함으로써 군왕의 잘잘못을 역사에 남기려고 노력했던 사관들의 투철한 소명의식을 믿고 있다. 따라서 양녕대군의 왕위 양보 문제는 야사보다 ≪실록≫을 통해 추적하는 것이 사건의 실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양녕대군이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방종, 일탈, 음행을 일삼았다고 치자. 그것이 사실이라면, 충녕대군이 보위寶位에 오른 이후에는 그런 행동을 중단했어야 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방종, 일탈, 음행을 계속함으로써 군왕 세종에게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또 양녕대군이 왕위를 양보할 의사가 있었다면, 시종일관 충녕대군을 지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1416년(이 때부터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의 경쟁자로 급부상했음)부터 폐세자로 내몰리기 직전인 1418년 5월 말까지 충녕대군을 자신의 경쟁자로 간주하고, 그에게 온갖 의심어린 눈길과 비판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어리의 일은 네(충녕대군 지칭)가 부왕께 아뢴 게 틀림없다.”(출처: 태종실록 18년(1418년)/5월/11일), 태종에게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출처: 태종실록 16년(1416년)/2월/9일)라고 비판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것은 왕위를 양보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로,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다음의 기록이다.

『여러 대군이 부마駙馬 청평군 이백강의 집에서 연회宴會하였다. 이백강이 아비(이거이를 지칭)의 상喪을 끝냈으므로, 여러 대군이 연회를 마련하여 위로한 것이었다. 임금이 명하여 세자도 또한 갔는데, 밤이 깊도록 세자가 기생 초궁장을 끼고 공주(태종의 장녀인 경신공주를 지칭)의 대청大廳으로 들어가서 즐기고 술을 마시다가, 공주에게 이르기를, “충녕(忠寧)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세자는 여러 동생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성례成禮하고 돌아오는 것이 가한데, 어찌하여 이같이 방종하게 즐기었느냐?”』

◇ 출처 : 태종실록 14년(1414년)/10월/26일

일부 사람들은 위 내용에 나오는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는 글귀를 보고, “양녕이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 비약이 지나치게 심한 주장이다. 1414년은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의 대안代案으로 인정받기 이전의 시기다. 이때는 양녕대군의 세자 자리가 확고했기 때문에, 그가 마음 놓고 동생을 칭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했던 태종이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을 칭찬했다.’는 것을 보고받고도 기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태종이 양녕대군의 행동을 일종의 ‘치기(稚氣; 유치하고 철없는 감정을 의미)’로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세자 본인의 행동거지는 엉망인 주제에, 마치 군왕처럼 아랫사람을 칭찬하며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었던 것이다. “왜 국본國本으로서 품위를 지키지 않고 방종하게 구느냐?”라며 일침을 놓는 태종의 모습에서 그것을 재확인할 수 있다.

또 양녕대군이 왕위를 양보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그것을 부왕 태종이 몰랐을 리가 없다. 태종이 누구인가? 태종은 평소 “사람과 말馬을 보는 눈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을 만큼 안목과 정보의 귀재였다.

더욱이 20세 안팎의 말썽 꾸러기였던 양녕대군에게 과연 사람 보는 안목이나 제대로 있었을까? 결국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는 양녕대군의 호평好評은 어떤 정치적 목적에서 나온 의도된 칭찬이 아니라 취중醉中에 했던 단순한 칭찬으로 보는 게 옳다는 생각이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다!

≪실록≫의 여러 내용을 상고詳考하면, 양녕대군은 효령대군을 무척 얕잡아보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것은 효령대군의 심성心性이 누구보다 착하고 따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상한 형이라면, 착한 동생을 보듬어주고 감싸주는 게 인간의 기본 도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양녕대군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다음의 두 기록은 효령대군에 대한 양녕대군의 일그러진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명하여 전 판관 이승, 전 소윤 권보, 악공 이법화, 환자宦者 김기 등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중략>... 임금이 이를 듣고 대노大怒하여 즉시 이승을 불러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승이 고했다. “작년 섣달에 신臣이 가족을 거느리고 곽선이 사는 적성현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어리가 서울에 사는 족친族親을 보고 싶다고 말하니, 곽선이 이를 허락하므로 즉시 신과 함께 왔었습니다. 며칠 있다가 신더러 말하기를, ‘근자에 기이한 일이 있다. 계지가 처음에는, “효령대군이 너를 보고자 한다.”라고 말하더니, 나중에는 “세자가 너를 보고자 한다.”고 말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병이 있고 얼굴도 예쁘지 않은데다 더욱이 지금은 남편이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고 하였다.’...<중략>』

◇ 출처 : 태종실록 17년(1417년)/2월/15일


『양녕대군이 사냥해서 잡은 새와 짐승을 절 안에서 구었다. 효령대군이 “지금 불공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소”라고 하니, 양녕대군이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자네의 5, 6월 이엄(耳掩; 귀를 덮는 방한구를 의미)은 왜 벗기지 못하는가.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효령대군을 지칭)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대답했다. 효령대군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중략>...』

◇ 출처 : 세종실록 28년(1436년)/4월/23일

위의 내용을 보면, 양녕대군의 철면피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양녕대군은 자신이 좋아하는 어리를 꼬드기기 위해서 계지라는 기생에게 매파媒婆역할을 시킨다.

그런데 기생 계지에게 “효령대군이 어리를 보고 싶어 한다”라며 사기詐欺를 치고 있다. 명백한 명예훼손감이다.

또 양녕대군은 효령대군이 불공을 드리는 절로 찾아와서 사냥해서 잡은 새와 짐승을 구워먹는 기행奇行까지 했다. 보다 못한 효령대군이 양녕대군에게 점잖게 항의하자 그는 “너는 영험도 없는 부처를 뭐 하러 믿느냐! 참으로 한심하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고 교만하기 그지없는 양녕대군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조선 후기의 학자였던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보면, 효령대군과 관련된 야사가 나온다. 그것을 보면, 양녕대군의 패덕悖德이 계속되자 효령대군은 장차 세자 자리가 자기에게 돌아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글공부에 몰두했다고 한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효령대군의 방을 지나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발길질을 하면서 “정말로 어리석구나. 너는 충녕에게 성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다. 효령대군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자주 찾던 절로 달려가서 하루 종일 북을 두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긍익이 살았던 조선 후기까지도 무엇인가 부드럽고 축 늘어진 것이 있으면, “효령대군이 쳤던 북 가죽 같다.”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야사일 뿐,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해줄만한 단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다!

효령대군과 충녕대군 사이에는 이렇다 할 갈등요소나 주요 이슈가 없었던 것 같다. ≪실록≫에서도 두 분간의 숨겨진 일화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태종이 4형제(양녕, 효령, 충녕, 성령대군)를 불러 놓고 우애를 강조했다는 기록만이 여러 차례 발견될 뿐이다.

두 형들을 대하는 충녕대군의 태도는 매우 판이했다. 양녕대군에게는 “세자답게 체통과 품위를 지키라!”고 주문하면서 까칠하게 대했지만, 효령대군에게는 따뜻한 형제애를 발휘했다.

그것은 효령대군이 충녕대군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흠 잡힐 일을 하지 않은데다 두 분 모두 태종과 원경왕후로부터 ‘찬밥 신세’였던 아픈 기억을 공유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록≫이 전하는 두 분의 관계는 거의 대부분 효령대군을 모시던 사람들의 각종 비리사건(아래 기록 참고)과 효령대군이 심취했던 불교와 관련된 조정 신료들의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가노家奴가 과전科田의 조租를 징수하면서 부당하게 쌀 10석, 콩 7석, 종이 50권卷과 잡물雜物을 거둔 것이 대단히 많았으므로, 헌부憲府에 내리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 출처 : 세종실록 10년(1428년)/1월/16일

효령대군은 종실의 대표로서 궁중에서 진행되는 각종 제사나 행사 등에서 어른 역할을 잘 수행하고 보위에 오른 동생 세종을 지근거리에서 성실하게 보필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효령대군은 가신, 노비, 하인들이 주인의 뒤 배경을 믿고 사악한 짓(예: 토지 점탈, 세금 포탈, 백성 구타 등)을 저지르는 바람에 조정 신료들의 거센 비판에 휘말려야 했다.

또 그는 불교에 심취해서 대규모 불사佛事나 수륙제水陸齊를 주도했고 원각경圓覺經을 강의함으로써 유학자인 조정 신료들과 심각한 마찰을 빚었지만, 세종은 그때마다 효령대군을 감싸주고 지켜주는 형제애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 그것은 태종의 마지막 유언이기도 했다.

김덕수 교수는 충북 오송에서 태어나 충북대 경제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고려대 강사, KAIST, KIST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96년에 공주대 교수로 부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공주대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책 집필, 정부기관 및 기업체 특강, 방송 출연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집필한 책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역시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던 명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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