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창업군주를 자처했던 태종은 조선 왕조가 자신의 후계자에 의해 확고부동한 기틀을 다진 후, 영원토록 번성하기를 바랐다.

또 그는 적장자가 왕위를 승계하는 전통을 확립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정통성과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시대적 흐름이 무력이 지배하는 ‘마상馬上의 정치’에서 논리와 명분이 정치의 근간이 되는 문치文治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즉 차기 군왕은 이력복인(以力服人; ‘힘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는 의미)의 창업형 군주가 아니라 이덕복인(以德服人; ‘덕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는 의미)의 수성守成형 군주임을 직시하고, 자신의 후계자를 그런 방향으로 키워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태종은 집권 4년째인 1404년에 11세의 이제李褆를 세자로 삼았다. 본래 이제는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태종은 이제 위로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세 아들이 그만 일찍 죽는 바람에 이제가 맏아들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출처; 세종실록 1년(1419년)/2월/3일) 그것은 처음부터 이제가 세자나 군왕의 운세를 타고 난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태종은 이제를 세자로 삼고, 그를 수성기에 적합한 군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도 이제는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철딱서니 없는 행동을 계속하다가 결국에는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경험하게 된다.

혹자는 이제가 자신보다 출중한 충녕대군 이도李祹를 위해서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분명하게 말하건대, 이제는 이도와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쫓겨난 양녕대군에 불과할 따름이다.

여기서는 태종이 이제를 세자 자리에서 내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입체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세자 이제는 수성기에 적합한 왕재王才가 아니었다!

태종은 이성계의 자식들 가운데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했던 아들이었다. 그는 고려 우왕 8년(1382년)에 있었던 진사시에서 2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인 우왕 9년(1383년)에 치러진 문과에서 7등으로 합격한 수재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이성계 집안의 자랑거리이자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태조 이성계와 달리 문무에 출중했던 그는 자신의 후계자가 청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학문 군주가 되기를 간절하게 열망했다.

그것은 적어도 자신의 아들만큼은 전통적인 무가武家집안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후계자가 천명天命과 민심民心을 대변하고 해석하는 신진사대부들과 격의 없는 의사소통을 하고, 그들의 폭넓은 지지와 신뢰를 얻어야만 수성기의 군왕 노릇을 잘해 나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종은 이제를 세자로 책봉한 후, 그의 학문 연마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우선 세자에게 제왕학의 기본 내용을 가르치기 위한 서연書筵제도를 만든 다음, 당대 최고의 석학(예: 하륜, 성석린, 황희, 변계량, 이래)들을 세자의 스승으로 임명해서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배려했다.

또 공부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이제의 학습을 돕기 위해서 별도의 요약집(要約集; 주요 경전에서 핵심사항만을 뽑아서 책으로 엮은 것)을 만들어 줄 정도였다.

그런데도 세자 이제는 부왕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고 수성기의 군왕에게 꼭 필요한 학문 연마를 게을리 함으로써 세자가 거쳐야 하는 서연書筵과정을 통과pass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는 곧 세자 자리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실록≫를 보면, 공부에 나태한 세자 이제를 지켜보면서 학문정진을 독려하는 태종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명하여 세자전世子殿의 환관宦官 두어 사람에게 종아리를 때리게 하였다. 임금(태종)이 세자에게 글을 외우도록 명하니, 세자가 외우지 못했다. 임금이 환관에게 종아리를 때리고, 하교下敎하기를, “만일 후일에도 또한 이와 같으면 마땅히 서연관書筵官을 죄주겠다.”하고, 문학文學 허조許稠를 시켜 이 말로써 세자에게 경고했다. 세자가 밤에 참군參軍 심보沈寶와 더불어 글을 읽고자 하였다.』

◇ 출처 : 태종실록 5년(1405년)/9월/14일


다른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서 세자 이제李褆를 내치다!

태종이 이제를 내쳤던 이유 중의 하나는 세자가 자신의 친동생인 효령대군 이보李補와 충녕대군 이도를 온전하게 지켜낼 만한 정치적 독립성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자 이제는 외할아버지인 민제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외삼촌 민무질을 비롯한 민씨 4형제들의 원격조종을 받기 쉬운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또 이제 주위에는 조만간 군왕의 자리에 등극할 것으로 예상되는 세자에게 온갖 아첨과 아부를 일삼으면서 훗날의 부귀영화를 도모하려는 세력(예: 구종수, 이오방, 은아리, 이법화, 강민, 한용봉 등)들이 쇠파리 떼처럼 달려들었다.

이제가 그런 자들에게 종속從屬당하지 않으려면 남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주체적인 판단능력, 그리고 그들을 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성리학적 지식과 교양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제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태종의 눈에 비친 이제의 모습은 이성보다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며,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내뿜어야 직성이 풀리는 호방한 성격의 철부지였을 뿐이다.

그런 이제에 대한 태종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결국 태종은 이제의 정치적 독립성 여부를 체크할 목적에서 무려 4차례에 걸친 ‘선위파동’을 일으켰다.

또 그 과정에서 자신의 후계자에 대한 잠재적인 위험인물들을 정확하게 선별한 다음, 그들에게 자진自盡을 명하거나 원지遠地유배를 보냄으로써 미래의 화근禍根을 사전에 제거하는 숙청을 단행했다.

특히 태종이 충녕대군 이도를 비롯한 다른 자식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세자 이제를 내쳤다는 근거는 ≪실록≫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중략>...지난해에 전하께서 장차 내선內禪을 행하려 할 때, 온 신민臣民들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질과 민무구는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으며, 전하께서 여망輿望에 굽어 좇으시어 복위復位하신 뒤에 이르러서도, 온 신민臣民들이 기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도리어 슬프게 여겼습니다. ...<중략>...또 듣건대, 민무질과 민무구가 주상께 아뢰기를, “세자世子 이외에는, 왕자들 가운데 영기英氣가 있는 자는 없애야 좋습니다.’ 하였다 하니, 금장(今將; 逆心을 의미함)의 마음을 품은 것이 명백합니다. ...<중략>...』

◇ 출처 : 태종실록 7년(1407년)/7월/10일


위 내용을 살펴보면, 민씨 형제는 태종의 내선(內禪; ‘임금이 살아있으면서 옥좌를 그 자식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을 반겼다가 태종이 그것을 철회하자 슬프게 여겼다.

또 민씨 형제는 매형인 태종에게 “세자인 이제 이외의 왕자들 가운데 총명한 사람(충녕대군 이도를 지칭)은 죽여 없애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제에게 왕위를 넘겨준 후, 그가 여러 아우들과 더불어 집을 죽 늘어세우고 우애롭게 사는 것을 지켜보고 싶어 했던 태종에게 있어서 민씨 형제는 더 이상 처남이 아니었다.

그들 형제는 오로지 불충不忠의 정점에 선 역신逆臣들에 지나지 않았다. 태종은 무예를 즐기고 본능에 따라서 행동하는 이제가 권력을 잡은 후에 저렇게 잔인무도한 민씨 형제의 사주를 받는다면, 자기 자식들이 도륙屠戮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태종은 그런 우려憂慮를 불식시키기 위해 민씨 형제를 죽인 다음, 이제를 세자 자리에서 내쫓았던 것이다.

참으로 태종다운 의사결정이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이제의 폐세자 이면裏面에는 그가 저지른 ‘어리 사건’보다도 민씨 형제를 비롯한 역신逆臣들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한 세자의 무능이 있었음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반성하지 않는 세자에게는 군왕 자리를 물려줄 수 없다!

필자는 태종을 연구하면서, 태종이야말로 ‘죄罪’의 본질적인 의미를 잘 아셨던 군왕이라는 생각을 무수히 가져보았다.

본래 ‘罪’라는 한자는 ‘넉 사(四)’와 ‘아닐 비(非)’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네 번 이상 실수를 해야 만이 죄가 성립한다’는 얘기다. 아마 태종도 그런 생각에서 세자 이제의 실수와 잘못을 용서하고 또 용서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에게서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는 자세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태종으로부터 꾸중을 들으면, 그때만 자숙하고 반성하는 척했다.

그리고 돌아서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태종 앞에서의 맹세와 반성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지존至尊의 전제조건은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극기복례克己復禮임에도 불구하고 세자 이제는 ‘수기修己’와 ‘극기克己’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친할머니 신의왕후 제삿날에도 아랫것들과 바둑을 두었고, 막내 동생 성녕대군이 죽었을 때는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 없이 궁중에서 활쏘기를 즐겼다.

또 밤이면 밤마다 동궁의 담을 넘나들면서 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여색(봉지련, 초궁장, 어리 등)에 대한 끝없는 탐욕으로 태종을 실망시켰다.

게다가 남의 집 사냥개를 훔치고, 국가가 금지한 석척회石擲會를 실시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소주를 지나치게 먹여서 죽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태종은 이제의 개과천선을 믿으며, 훌륭한 왕재王才로 거듭나길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이제의 DNA 속에는 태종의 기대에 부응할만한 자가교정 프로그램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내 태종이 폐 세자를 결정하고도 남을만한 대형 사건이 터지고 만다. 세자 이제의 비극적인 종말은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세자의 음행과 일탈행위를 더 이상 참지 못한 태종이 “세자의 첩을 모두 궐 밖으로 내보내라”는 엄명을 떨어지자, 이제는 태종에게 내시 박지생을 보내 항의편지를 전달했다. 그 편지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세자가 내관 박지생을 보내어 친히 쓴 편지를 올렸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바깥에 내보내어 사람들과 서로 통하게 하면 성예聲譽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므로, 이 때문에 내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도록 신의 여러 첩을 내보내어 곡성哭聲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 차니,...<중략>... 한나라 고조가 산동山東에 거居할 때에 재물을 탐내고 여색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였고, 진왕晉王 광廣이 비록 그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그가 즉위함에 미치자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중략>...숙빈이 아이를 가졌는데 일체 죽粥도 마시지 아니하니, 하루아침에 변고라도 생긴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일호一毫라도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것입니다.”...<중략>...』

◇ 출처 : 태종실록 18년(1418년)/5월/30일

그때가 태종 18년(1418년) 5월 30일이었다. 이제는 그 편지에서 “아버지의 시녀들은 모두 궁중에 들이면서 왜 내 첩들만 궐 밖으로 내보내느냐?”는 식의 항의를 하면서 “숙빈이 임신을 했는데, 이 일로 변고라도 생기면 부왕께서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협박까지 일삼았다.

태종은 세자 이제가 중국의 태갑(太甲; 은나라 ‘탕’임금의 손자로서 왕위에 오른 뒤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신하 이윤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반성한 다음, 자기혁신을 통해 성군이 되었음)처럼 개과천선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이제를 세자 자리에서 내친 후, 그를 경기도 광주로 추방했다. 조선의 역사가 새롭게 펼쳐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집필자 소개> 김덕수 교수는 충북 오송에서 태어나 충북대 경제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고려대 강사, KAIST, KIST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96년에 공주대 교수로 부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공주대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책 집필, 정부기관 및 기업체 특강, 방송 출연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집필한 책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역시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던 명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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