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3대 임금이었던 태종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냉혹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그것은 역사가들의 평가가 ‘99가지의 선정善政이 1가지 악정惡政을 상쇄하지 못한다.’는 ‘최소량의 법칙(law of minimum;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독일의 식물학자인 유스투스 리비히임)’에 기초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강둑의 수위水位는 제방의 가장 높은 부분이 아니라 가장 낮은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듯이, 태종에 대한 평가도 그의 최대 업적보다도 가장 나쁜 악덕惡德에 의해서 판가름 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또 그게 바로 세상의 인심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태종에 대한 역사가들의 혹평에 대해 그리 동조하는 입장이 아니다. ≪태조실록≫, ≪정종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의 곳곳에 배어 있는 태종의 언어, 열정, 사고思考, 카리스마, 실천력, 인재를 보는 안목 등을 보면,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서 그만한 임금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태종이 중시했던 ‘군왕의 자질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곧이어 다루게 될 세자 양녕의 폐 세자에 얽힌 역사적 비밀을 명쾌하게 풀어줄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것이다.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극기복례克己復禮’; 학문 연마에 진력하라!

태종이 지향했던 군왕의 첫 번째 덕목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의미임)‘과 ’극기복례(克己復禮;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을 이겨내고 사회적 규범인 예를 따른다’는 의미임)‘의 실천이었다.

그는 수기치인과 극기복례에 이르는 첫 관문으로서 ’격물치지(格物致知;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서 완벽한 앎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함)‘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학문 연마를 중시했다. 왜냐하면 수기修己나 극기복례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백성들을 다스릴 군왕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제왕학帝王學에는 4단계의 교육과정이 있었고, 그 수련과정을 제대로 통과해야만 군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보양청(輔養廳; 원자 아기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기관) ⇒ 강학청(講學廳; 원자 아기의 글공부를 담당하는 기관) ⇒ 서연(書筵; 세자의 본격적인 학문수련을 하는 자리를 의미함) ⇒ 경연(經筵; 국왕이 학식이 뛰어난 신하들과 더불어 학문과 정치를 주제로 학습을 하는 자리를 의미함)’이 그것이다.

태종이 학문 연마를 중시했던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시대까지는 철권통치鐵拳統治를 필요로 했지만, 다음 시대부터는 수성守成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지금까지는 역성혁명의 성공과 조선의 건국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지만, 후임 군왕의 시대에는 무력으로 통치를 하는 ‘마상馬上의 정치’가 용납되지 않을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성리학적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만이 군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신념에서 후계자 교육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정치적 독립성을 견지하라!

태종이 중시했던 군왕의 두 번째 덕목은 ‘어느 정치 세력에게도 종속당하지 않는 정치적 독립성의 유지’였다. 태종이 구상했던 조선의 통치체계는 군왕이 통치의 주체가 되는 전제군주제였다.

반면에 정도전, 남은, 심효생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은 군왕과 신하가 함께 통치하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정도전 일파가 혁명의 1등공신인 태종 이방원을 제쳐두고 나이 어린 방석을 세자로 옹립했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그것은 경처景處출신의 신덕왕후 강씨와 정도전 일파의 상호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잘못된 후계자 선정은 결국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참극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한편, 제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정치적 실권을 잡은 태종은 왕권 강화를 추구했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독립성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수많은 공신功臣들, 종친들, 그리고 외척外戚들의 발호를 차단하고 그들의 전횡을 막을 수 없는 한, 군왕은 일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태종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그는 과거의 혁명동지들이 사악한 마음을 갖지 않고 자신에게 진심으로 협조하는 한, 그들을 후히 대접해주면서 옛정을 잊지 않았다. 조준과 남재(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측근들에게 주살당한 남은의 형임)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거나 세자를 이용하여 후일을 도모하려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숙청해 버렸다.

자신의 처남들이자 혁명동지였던 민씨 4형제(민무질, 민무구, 민무회, 민무휼)을 유배지에서 사사賜死시키고, 세종의 장인이자 자신의 사돈인 영의정 심온에게 자진自盡을 명했으며, 충복忠僕이자 평생지기인 이숙번을 내친 다음 유배지에서 죽게 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를 끄는 것은, 태종의 잔혹함이 결코 자신의 왕권강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모든 악업惡業은 내가 짊어지고 가겠다. 그러니 주상(세종을 지칭)은 성군聖君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라”는 태종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사후死後에 일어날 수 있는 후계자의 정치적 종속을 가장 크게 염려했다.

그리고 후계자의 정치적 독립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위험인물들을 자신의 임기 동안에 깨끗이 제거했다.

세종의 태평성대 뒤에는 이와 같은 태종의 뜨거운 부정父情과 미래를 내다보는 예리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바라볼 때, 태종은 매우 괜찮은 리더였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는 자세를 가져라!

태종이 강조했던 군왕의 세 번째 덕목은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는 자세’였다. ≪논어≫를 보면 ‘과이불개 시위과이(過而不改 是謂過矣; ‘잘못을 고치지 않는 것이 잘못이다’는 의미임)’라는 글귀가 나온다.

공자는 ≪논어≫를 통해 “잘못을 고치는 것을 꺼려해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이것은 ‘실수를 자신의 허물로 인정하고, 스스로 잘못된 점을 고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진보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태종은 자신의 과오過誤를 인정하지 않고, 고집으로 일관하는 후계자의 등장을 경계했던 사람이다.

그는 늘 “군왕은 냉철한 자기절제력과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자세로 국정을 수행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군왕 스스로 돌이켜 반성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장차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고뇌했다.

그러나 태종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세자 양녕을 비롯한 자식들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실수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다만, 자신의 과오에 대해 솔직하게 시인하고 겸허한 자세로 반성한 다음,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자신의 몸가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게 태종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모든 자식들이 그런 부왕의 마음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세자 양녕은 시종일관 부왕의 뜻에 반하는 일탈, 방종, 음행을 일삼으며, 반성을 모르는 철면피鐵面皮의 자세로 태종의 기대를 저버렸던 후레자식이었다.

신하들의 하찮은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도 엄격했던 태종이 세자 양녕의 비행非行을 막지 못했던 것을 보면, 천하를 호령했던 그도 자식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고슴도치 아비’였던 것 같다.

‘시대’를 읽는 머리와 ‘사람’을 보는 눈을 가져라!

태종이 중시했던 군왕의 네 번째 덕목은 ‘시대’를 읽을 줄 아는 머리와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군왕이 시대의 흐름이나 사람을 잘못 판단할 경우, 그에 따른 폐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반도국가인 조선은 해양국가인 일본과는 달리, 태생적으로 중국이라는 대국大國을 머리에 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선의 군왕이 가장 크게 신경 써야 할 사항은 중국의 대륙에서 전개되고 있는 패권覇權의 변화였다. 그는 중원中原의 패권변화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읽어냈고, 지성사대至誠事大라는 최적의 외교정책을 통해 조선의 평화와 백성들의 안녕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태종의 지성사대 외교를 굴욕적인 대명외교對明外交라고 혹평한다. 그러나 그것은 중원의 현실을 도외시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태종 2년(1402년)에 중원에서는 천자天子자리를 놓고 주원장의 손자인 혜제와 숙부인 연왕(燕王; 훗날 영락제 성조가 되어 자금성을 건설하고, 환관 정화를 통해 해양 원정을 주도했던 대외 확장형 황제였음) 사이에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쿠데타에 성공했던 주역들이 그러하듯이 태종 역시 폭넓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중원에서 혜제가 연왕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더니 마침내 ‘혜제가 봉천전에 불을 지르게 한 후, 대궐 한가운데서 목매달아 죽었으며, 6월 17일에 연왕이 황제(성조)의 자리에 올랐다.’는 첩보가 태종에게 전달되었다.

태종은 신속하게 건문建文이라는 연호의 사용을 중지하고, 홍무라는 연호를 쓰도록 지시했다. 또 좌의정 하륜을 하등극사(賀登極使; 일명 축하사절)로 파견해서 새로운 황제의 등극을 하례하고 혜제로 부터 받은 고명(誥命; 왕위를 승인하는 공식문서)과 인신(印信; 작위를 줄 때, 그것을 증명하는 증표로 주던 인장을 의미)을 반납한 후, 성조로부터 새로운 고명과 인신을 받는 절차를 밟도록 했다.

그런데 태종의 이러한 발 빠른 조치가 성조로부터 신뢰를 받게 되고, 결국 성조는 조선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물론 명나라의 성조가 그렇게 나오게 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태종과 성조가 이미 태조 3년(1394년) 11월 19일에 연부(燕付; 당시 연나라 수도인 북경을 의미함)에서 반갑게 해후했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태종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다. ...<중략>...명나라 선비들이 태종을 보고 모두 조선 세자라 하면서 대단히 존경하였으며 태종이 연부燕府를 지날 때, 연왕燕王을 접견했는데 곁에 시위하는 군사가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하였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 금릉으로 가던 도중에 연왕도 금릉에 가기 위해서 수레와 말을 몰아 앞서가려고 하였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도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가마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중략>...』
◇ 출처 : 태조실록 3년(1394년)/11월/19일

이때 이방원은 함께 갔던 남재와 조반에게 “연왕은 왕으로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방원이 자신을 한눈에 알아본 것처럼, 연왕도 이방원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조만간 조선의 임금이 될 사람’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한우 저,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2005, p.110에서 인용)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일종의 우정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람의 인물됨과 그릇의 크기를 알아보고 중원의 패권변화를 정확하게 읽어낼 줄 알았던 태종이 있었기에 조선 백성들은 전쟁의 참화慘禍를 피해갈 수 있었다.

베트남 정복, 정화 함대의 서양 파견, 여진족 정벌을 완료하고 대대적인 몽골 정벌에 나섰던 성조의 공격성을 고려할 때, 조선에 대한 그의 우호적인 태도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서 이는 태종의 지성사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도 태종은 위대한 리더였다.

김덕수 교수는 충북 오송에서 태어나 충북대 경제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고려대 강사, KAIST, KIST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96년에 공주대 교수로 부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공주대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책 집필, 정부기관 및 기업체 특강, 방송 출연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집필한 책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역시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던 명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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